그 많은 프린트는 어디로?
“오, 필름으로 몸을 두르셨군요!” 웬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면박당할지 모르겠으나, 폴리에스테르 재질의 옷을 걸치고 있다면 던진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상영이 끝난 영화의 프린트용 필름은 배송업체에 모두 수거되면 2cm가 넘지 않도록 잘린 다음, 폴리에스테르 재질의 옷과 카펫 등의 직물을 만드는 데 쓰여지기 때문이다.
할리우드의 경우 필름 재활용까지 도맡는 포스트 프로덕션 서비스 회사들까지 있다. FPC사가 대표적이다. FPC사가 미국 테네시주의 마운트시티와 이탈리아의 밀라노에 자리한 공장을 가동해서 연간 재활용하는 필름의 양은 무려 45억 피트. 환산하면 137억km다. 상상이 안 된다면 이렇게 말해보자. 서울과 부산을 무려 1590만번 왕복할 수 있는 엄청난 길이다.
이러한 필름은 옷과 카펫을 만드는 데만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일정한 광학처리를 통해 엑스레이용 필름으로 바뀌기도 한다. 또 석탄을 대신하여 화력발전소의 연료로 각광받기도 한다. FPC사는 연소시 유해물질을 배출하지 않는 기술까지 개발, 미 환경보호국의 인증을 따내기도 했다. 심지어 공예 기술자들의 가공을 통해 인도에선 여성들의 장신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FPC사는 1952년 설립부터 20여년 동안 당시 대부분이었던 흑백필름의 은입자를 벗겨내는 데 주력했다. 그렇게 해서 각인된 이미지들을 털어낸 뒤, 여기에 마그네틱 띠를 붙여 사운드 레코딩 필름으로 재활용하는 아이디어를 실용화하는 데 성공했다. 1998년 코닥사에 합병된 FPC는 50년 넘게 환경친화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데 앞장선 공로를 인정받아 아카데미로부터 공로패를 수상하기도 했다.
상영 뒤 필름 소거는 본디 프린트가 유출되어 저작권이 침해되는 사태를 막기 위한 것. 여기에 더해서 필름 그 자체가 유해물질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편당 수천벌의 프린트용 필름(예를 들어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의 경우 북미 지역 개봉을 위해 필요한 프린트의 수만 무려 8400벌이다)을 매번 땅에 매립하거나 소각하는 것만큼 비경제적인 것도 없다. 할리우드의 필름 재활용이야말로 ‘도랑치고 가재잡는’ 일이다.
우리 경우는 어떨까. 필름배송업체인 대경의 우지만 팀장에 따르면, 개봉 이후 예상되는 국내외 상영을 위한 프린트를 제외하곤 자체적으로 모두 소각한다. 한국영화의 경우 상영을 위해 마련된 프린트 수가 150벌이라면 대략 120여벌이 불태워진다. 외화의 경우는 한두벌 정도를 제외하곤 모두 소각장에서 처리된다. 십여년 전, 필름을 빼돌려서 푼돈을 챙기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에 비하면 프린트 관리는 엄격해진 셈이다.
하지만 배급사들의 경쟁적인 와이드 릴리즈(전국광역 동시개봉) 고수로 인해 폐기되는 프린트는 늘어났는데도 불구하고 합리적인 자원활용 방안이 전무하다는 점은 되돌아볼 문제다. 90분 길이의 프린트 한벌을 제작하는 데 들어가는 돈이 대략 160여만원. 큰 영화는 100벌 이상 찍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청어람의 최용배 대표는 “배급사들이 경쟁적으로 프린트 수를 늘리는 것을 자제한 다음 좀더 장기적인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영화진흥위원회 등이 나서서 강구할 수 있는 사안이다. 여러모로, 아껴야 잘산다. 이영진 ant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