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이 이끈 스파이 길, "무엇도 믿지마라" 혹독함
아버지는 알 수 없는 비행기사고로 죽었다. 어쩌면 미국 버지니아주 랭글리의 CIA본부의 현관에 있는 ‘추모의 벽’에 새겨진 별 하나일지도 모른다. MIT를 졸업한 아들 제임스 클레이튼은 델 컴퓨터의 스카웃 제의를 받은 날, CIA의 첩보요원 선발관인 월터 버크라는 인물을 만난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풀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호기심에 “실패만 기억될 뿐, 성공은 아무도 관심갖지 않는” CIA 스파이의 길에 클레이튼은 발을 내디딘다.
콜린 파렐과 알 파치노라는 두 스타를 내세운 스릴러 <리크루트>는 CIA의 비밀요원 선발과정을 실감나게 그려나간다. CIA는 이 영화를 위해 현직 대변인이 자문에 참가하도록 하고, 랭글리 본부를 제한적으로나마 공개했다. 국가기관의 협조와 제작진의 상상력이 결합한 ‘사육장’이라 불리는 훈련본부는, 첨단적인 느낌과 동시에 거칠고 야생적인 분위기를 묘하게 풍긴다. 필기시험을 통과한 이들은 여기서 온갖 훈련을 받는다. 미행·심문·폭파·도청·심리전 모든 것의 원칙은 “보이는 그대로를 믿지말라”는 것이다. 제임스가 호감을 느끼는 여자요원후보생 레일라와의 관계 또한 가혹할 정도로 냉정한 요원교육과정과 탄탄하게 엮여들어가며, 흔히 스릴러물에선 양념에 불과했던 로맨스의 구실을 넘어서 긴장감을 유발시킨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선 별 매력없던 파렐은 불안과 의심에 휩싸인 신참 CIA요원에 싱싱하게 어울리고, <코요테 어글리> 등에 출연했던 브리짓 모이나한은 강단있어 보인다.
하지만 <리크루트>의 미덕은 이 정도다. 제임스가 사육장에서 퇴소당하고 다시 ‘아버지 같은’ 버크의 비밀지시를 받는 CIA요원이 되고 난 이후 얽히는 스토리는, 스릴을 느끼기엔 답답할 정도로 엎치락뒤치락을 반복한다. 사람이 사람되기 힘들어보이던 정보원의 세계를 실감나게 묘사했던 전반부에 비해, 한 인물의 광기같은 분노에 따른 음모로 결론맺는 후반부는 너무나 단순하다. 알 파치노의 트레이드 마크인 웅변조의 대사가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다. <노 웨이 아웃> 등의 로저 도널드슨 감독. 14일 개봉.
김영희 기자 do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