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우함과 정직함
1985년 겨울은 좀체 시간이 가지 않았다. 시간당 4만원이 넘게 수업료를 지불하면서 태업으로 일관한 대학 4년을 마치고 나니 머리 속이 휑했다. 입대까지는 한달이나 되는 시간이 남아 있었는데,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소설보고 낮잠자고 낮잠자다 다시 소설보고…. 시간은 뭔가 대책을 내놓으라고 다그치는 빚쟁이처럼 부담스런 존재였다. 나는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책꽂이에 더이상 읽을 소설이 없어진 뒤로는 묵은 시집을 가나다순으로 꺼내 다시 읽기 시작했다. 특히 ‘생애와 사상’ 외에는 이해가 잘 안 됐던 시집을 열심히 복습했다. 그중에는 랭보의 <지옥에서 보낸 한철>도 끼어 있었는데, 정말이지 한철 내내 이해가 안 됐다. 나는 해설자가 부여한 ‘천재시인’이란 호칭을 ‘좀처럼 이해 안 되는 시’를 쓰는 시인으로 정리하고 랭보하고 굿바이했다.
그뒤로는 거의 시를 읽지 않았다. 군대가고 제대하고 취직하고 장가가서 딸 낳는 것 구경하고…. 쏜살같이 진행되는 생활의 속도에 시의 모호함은 군살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십여년이 흐른 뒤 정말 엉뚱한 장소에서 다시 랭보를 만나게 됐다. 아무런 사전정보 없이 <토탈 이클립스> 시사회에 갔는데, 랭보와 베를렌의 동성애를 다룬 영화였다. 호평을 받은 영화는 아니었지만, 나는 헤어진 첫사랑을 10년 만에 가정법원 앞에서 만난 것처럼 흥분했다. 집에 돌아와 <지옥에서 보낸 한철>을 펼쳤다. 빛바랜 종이 위에 빨간 볼펜으로 군데군데 밑줄이 쳐져 있었다.
“나는 모든 책을 다 읽어버렸다.”
왜 그때 이 대목에 밑줄을 그어놓았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밑줄 쫘악’ 치고 해석을 하라면 자신이 없다. 그런데도 언제부턴가 랭보가 삶의 한 시점에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게 보이게 됐다. 그의 시는 말과 삶이 개기일식처럼 군더더기 없이 포개진다. 그의 삶은 고아처럼 불우하고 그의 말은 비수처럼 정직하다. 남들이 보지 않는 세계를 응시하기 때문에 불우하고, 그 불우함에 정직해야 하기 때문에 더욱 불행하다. 그리고 애초에 불우했고, 충분히 정직했기 때문에, 20대에 절필하고 방탕으로 일관한 생의 마지막까지 단 한장의 반성문도 제출하지 않았다. 나는 랭보를 통해서 모든 천재성의 징후는 불우함과 정직함에서 시작된다는 편견을 갖게 됐다.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아비그네일은 실존했던 천재적인 사기꾼이다. 아도르노가 <순수이성비판>을 읽었다는 나이보다 두어살 많은 10대 후반에 그는 파일럿, 의사, 변호사 등을 사칭하며 수표 위조로 단시일에 수백만달러의 돈을 모은다. 그 과정은 종합예술이다. 독창적인 기획, 성실한 현장답사, 정교한 장인적 솜씨, 대담하고 능란한 연기, 어느 것 하나 흠잡을 구석이 없다. 그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으면 천재소리가 절로 나온다. 어떻게 십대의 나이에 저럴 수가 있을까 상식으론 이해가 안 된다. 그런데 범죄로 나서는 계기나 체포되는 과정을 보면 그는 어쩔 수 없는 어린애다.
부유하던 집안이 망하고 엄마가 아버지의 친구와 결혼하는 데 충격을 받고 가출한 그는 잃어버린 아버지의 재산을 찾아주기 위해 사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체포되는 것도 미군으로 프랑스에 진주한 아버지가 어머니를 만난 프랑스의 한 마을에서 체포된다. 그는 지극히 자상했던 아버지에 대한 사랑 때문에 사기에 입문했고, 가족을 배신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체포된다(물론 창의적인 속임수는 아버지의 유머감각에서, 안면몰수하고 등돌리는 재주는 어머니의 작부 기질에서 물려받은 점이 없지 않다). 아버지가 사망하고 어머니가 새로운 딸을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것을 목격한 그는 더이상 “나 잡아봐라” 하고 도망가지 않는다. 자신이 유일하게 마음에 품고 있었던 관중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곁에 남은 단 한명의 새로운 관중, 끝까지 자신을 추적하고 체포해서 깊은 관심을 보여준 수사관의 곁에 남는 길을 택한다.
나는 아비그네일을 천재로 만든 계기들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불우했고, 불우함이 선사한 절실함으로 사람을 마음에 품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힘으로 자신을 편집증적인 몰입으로 몰아갈 수 있었다. 현란한 창의력은 어린아이의 정직함으로 지도를 그려나갔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자신만의 영토, 그러니까, 어른 세계의 등잔 밑이다. 애초에 어른 세계의 규범을 염두에 두지 않고 사기를 시작했기 때문에 그는 반성도 하지 않았다. 반성은 보편적인 가치에 개인적 경험을 대조해서 보편적 성장을 지향하는 행위이다. 아비그네일이 연방수사국의 위조수표 전문요원으로 새 삶을 시작하는 과정에는 제도에 대한 고해가 없다. 그건 그가 나빠서가 아니라 무례하게 정직하기 때문이다.
나는 고해하지 않은 인간 둘을 기억한다. <이방인>의 뫼르소는 사형선고를 받고도 신부의 회개를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생애 처음으로 고독한 어머니의 삶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회개를 대신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평생 소년의 호기심과 수컷의 본능으로 살았지만, 죽을 때까지 아무런 반성을 하지 않았다. 그는 죽음 직전 창가로 달려가 자신을 텍스트로 읽어준 단 한명의 사람을 추억하는 것으로 기도를 대신했다. 이 사람들은 돈, 권력, 명예, 천국이 없어도 사람 하나만 있으면 평생 살 사람들이다. 그러니, 세상의 모든 “나 잡아봐라”는 연애영화가 아닌가. 남재일/ 고려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