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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스 센스>의 쌍생아
2001-01-05

나이트 샤말란의 두번째 영화 <언브레이커블>의 코드

“누구의 인생에든 의혹은 있는 거란다. 무엇을 찾든간에.”(<와이드 어웨이크> 중에서)

19991년 11월, 뉴욕대 학생이던 나이트 샤말란은 대학 내의 한 암실에서 마지막 영화가 될지도 모르는 자신의 졸업작품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22살이 될 그는 어둠 속에 앉아 피로와 공허감이 엄습해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뉴욕대학 영화과의 유일한 인도인 학생이었다. 또한 자신이 그토록 보고 싶어하는 가족들이 있는 필라델피아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받을 학위가 현실세계에서는 아무 쓸모도 없다는 것 역시 직감하고 있었다. 4년 전, 의사였던 부모의 권유를 마다하고 샤말란은 필라델피아 의과대학의 전액 장학생 자리를 거절했던 터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이 아직 이루어 놓은 게 아무것도 없다고 느꼈다. 그날 저녁, 나이트 샤말란은 자리에 앉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고 오랫동안 느끼고 있었던, 이방인으로 미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관한 시나리오를 쓰기로 결심한다. 이렇게 해서 고국 인도를 방문하는 인도계 미국인 대학생의 이야기를 다룬 <프레잉 위드 앵거>(Praying with Anger)는 나이트 샤말란의 첫 장편영화가 되었다.

낯익은 수법, 맥빠진 반전

그뒤 6년이 흐른 1997년 9월, <와이드 어웨이크>로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참패를 맛본 나이트 샤말란은 아내와 딸과 함께 로스앤젤레스의 한 호텔에서 묵고 있었다. 하루 40통이 넘는 전화가 그를 찾는 데도 샤말란은 딸의 기저귀를 갈아주는 데 여념이 없었고, 이번에 그는 6년 전과는 다른 자신감에 차 있는 듯 보였다. 아동심리학을 전공한 아리따운 아가씨 하브나와 첫 번째 만남에서 결혼을 결심했고, 이번 시나리오는 브루스 윌리스가 주연을 맡을 것이라는 예감까지 들었던 터니까. 걱정스런 아내의 눈길을 뒤로 한 채 전화를 받던 그는 이윽고 자못 흥분되어 있는 전화 속의 인물과 달리 조용히 아내에게 속삭였다. “300만달러를 주겠대.” 아내와 남편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고, 이렇게 해서 할리우드 역사상 세 번째로 비싼, 그리고 아홉 번째의 흥행수익을 올린 <식스 센스>의 시나리오는 디즈니의 품에 안겼다.

나이트 샤말란의 신작 <언브레이커블>은 <식스 센스>에서 ‘뒤로 돌아 제자리 서’한 묘한 구석이 있는 영화이다. 자신이 팽팽하게 살아서 아이들을 치료하고 있다고 믿었던 사나이는 영화의 마지막, 자신이 걸어다니는 유령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데 미식축구장의 가드가 되어 돌아온 이 사내, 처음엔 유령 같은 삶을 사는 듯하다 가면 갈수록 세상에서 가장 힘이 넘치는 슈퍼히어로가 되는 것이 아닌가. 반전? 물론 우리의 브루스는 이번에 죽지 않는다. 죽기는커녕 오히려 너무 힘이 넘쳐서 탈이지.

이에 비하면 새뮤얼 잭슨은 콧바람에도 뼈가 부러지는 약골 중의 약골이다. <식스 센스> 때 2회 관람까지 했던 열성으로 영화를 뜯어보자. 그가 왜 만화 속 악당들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유리지팡이를 가지고 다니고 새까만 피부에 새까만 가죽옷을 입고 돌아다니겠는가. 이것만 알아도 마지막 반전의 답은 척 하면 삼천리 금수강산. 비행기 사고에서 살아 남은 자의 죄의식이야 피터 위어 감독이 <공포탈출>에서 이미 선수를 친 것이고, 선과 악의 대결이야 앤드루 케빈 워커가 쓴 <쎄븐>의 반전을 따라갈 리 만무하다. 그런데도 샤말란은 굳이 어두운 색조의,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 속도감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다 이 모든 것을 보상할 희대의 역전 홈런을 치는 <식스 센스>의 방법을 충실히 반복한다. <식스 센스>의 방법이 이번에도 먹힐 것이라고 생각했나. 아니면 관객의 뒤통수를 치는 데 재미가 붙었나. 히치콕과 스필버그를 우상으로 모시고 있으며, 나이 서른에 할리우드에서 가장 성공한 감독 중 하나가 되어 실제로도 스필버그와 여러모로 비교가 되는 나이트 샤말란은 <언브레이커블>에 대한 영화평론가들의 비판을 스필버그의 <미지와의 조우>에 대한 비판쯤으로 여기고 있다고 한다(<뉴요커>의 샤말란 인터뷰에서). 그런데 <언브레이커블>을 보고 <미지와의 조우>를 떠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하다. 다만 전작 <식스 센스>의 반전만을 기억하며 줄곧 <언브레이커블>을 <식스 센스>와 비교할 뿐이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통의 관객이 <언브레이커블>을 보며 느끼는 마지막 느낌은 사실 <식스 센스> 때의 반전과는 또다른 종류의 것이기도 하다. <식스 센스>의 반전에선 속고도 기분좋은 완벽한 지능적 사기범을 만났다는 경이로움에 압도당했지만, <언브레이커블>의 반전은 미숙한 사기범에게 돈을 강탈당한 것 같은 일종의 불쾌감이 먼저 느껴진다. 일단 <언브레이커블>은 스펙터클이 없는 영화이다. 변변한 CG나 특수효과도 만무하고 기차 충돌 장면이나 빌딩 폭파, 악당과의 통쾌한 격투 장면 등 관객을 현혹시킬 만한 서비스를 일절 배제시킨다. 모든 사건과 액션은 인물들의 대사로 관객에게 전해질 뿐이며, 심지어 보여줄 듯하다 한두 장면 직전에서 멈추어 사람 약오르게 만든다. 요컨대 <언브레이커블>은 곰곰이 뜯어보면 시각적인 쾌락을 줄 만한 요소가 단 하나도 없는 영화이고, 이건 일부러 샤말란이 배제시킨 부분이기도 하다.

게다가 엔딩의 역전, 새뮤얼 잭슨이 분한 이사야가 희대의 악의 화신이라는 사실은 이제까지 세상에서 가장 취약하지만 고상한 인간승리의 표본으로 동일시하던 이사야에게 갑자기 관객의 애착을 떼어버리라는 불쾌한 명령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언브레이커블>은 철저히 드라마라는 요소로, 그것도 심리 스릴러물로 승부를 걸었다. 문제는 <언브레이커블>에서 나이트 샤말란이 비장의 무기로 보여준 많은 것들이 이미 <식스 센스> 때부터 써먹던 판박이 같은 도돌이표 수법이라는 것이지만.

<식스센스>에서 되돌아, 제자리에 선

나이트 샤말란은 통뼈 영웅이라는 새 이야기를 헌 부대에 담아버리는 좌충수를 두면서도 <식스 센스>의 효과를 극대화하겠다는 자가당착에 발을 헛딛고 있는 듯 보인다. 일단 <언브레이커블>의 연출상 가장 두드러진 점은 브루스 윌리스가 자신이 슈퍼히어로라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 끊임없이 어디엔가 갇혀 있다는 설정이다. 영화의 첫 시작, 불안한 기차여행의 심리를 막힌 기차 좌석의 미장센으로 끌고 가던 샤말란은 이후에도 자신의 본성을 깨닫지 못하는 브루스 윌리스를 벽과 벽 사이의 닫힌 미장센에 계속 가두어 둔다. 그가 이러한 닫힌 미장센에서 해방되는 날은 자신이 슈퍼영웅임을 깨닫게 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이다. 그런데 <식스 센스>의 말콤 박사의 내면은 또 어떻게 형상화되었던가? 말콤 박사 역시 <식스 센스>의 첫 장면에서부터 자신의 업적을 새긴 또다른 프레임인 액자틀에 갇혀서 반사된 존재로 비추어졌다. 그리고 감독은 이러한 프레임에 갇혀 주변을 보지 못하는 말콤 박사의 상태를 “귀신들은 자신이 죽은 걸 몰라요.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지 않고 원하는 것만 쳐다봐요”라는 한마디로 판결했다.

공통점은 또 있다. 바로 타자와 자아를 뒤섞어버리는 나이트 샤말란 특유의 세계관이다. <식스 센스>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귀신들은 오히려 어린 콜 시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 들고, 귀신과 콜 시어의 관계는 적대적인 피학·가학의 관계를 넘어 서로의 존재를 알아보는 공존의 단계로 넘어간다. <언브레이커블>의 가장 중요한 축인 이사야와 슈퍼영웅 데이비드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감독은 재삼새삼 이들이 한뿌리에서 나왔으며, 절대선을 180도 회전하면 절대악에 도달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실제 거꾸로 물구나무를 선 화면이나(거꾸로 머리를 박고 브루스 윌리스를 쳐다보는 아이 등 영화에는 상하가 뒤집힌 화면이 자주 등장한다) 180도 원형으로 빙빙 도는 연출, 또한 선과 악이 대결하는 코믹 북스의 세계는 이러한 주제를 형상화하는 구체적인 스타일들이다. 주인공 데이비드는 절대적인 선의 입장이 되자 오히려 악에 대해 맹점을 갖게 되었다(재미있는 것은 <언브레이커블>의 제작사가 블라인드 에지, 즉 맹점이란 뜻을 가진 영화사라는 것이다). 귀신이 타자가 아니라는 것은 기존의 호러 장르의 관습을 뒤엎는 것이지만, 선과 악이 서로 상충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여러 영화에서 두루두루 다룬 지당한 말씀이다. 그런데도 나이트 샤말란은 스펙터클을 희생하고 숨겨진 힘에 대한 깨달음에 그리고 이 세상에 진정한 타자는 없다는 자각의 ‘과정’에 다시 한번 도전한다.

<와이드 어웨이크>를 거쳐 <식스 센스>와 <언브레이커블>에 이르기까지 나이트 샤말란 영화세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주제는 바로 ‘발견’(find)의 테마이다(마치 스필버그의 영화세계에서 ‘구하기’(Saving)가 가장 중요한 테마인 것처럼). 나이트 샤말란의 영화에는 반드시 소년, 그것도 세상에 극히 민감하고 가족에게 공고히 애착하는, 세상에 대해 지나치게 예민한 소년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학교에서 소외되고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이라는 고통을 경험하지만 조숙한 직관력으로 종국에는 초자연적인 파워를 가진 절대적인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 <와이드 어웨이크>에서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해주던 할아버지의 죽음에 봉착한 소년 조슈아는 할아버지가 천국에서 잘 계시는지 알아보기 위해 신을 찾아 헤맨다. 소년 조슈아는 결국 자신과 동등한 소년으로 모습을 분한 천사를 만나게 되는 작은 기적을 맞이한다. 마찬가지로 <식스 센스>의 콜은 대리부 같은 말콤 박사를 떠나 보냄으로써 자신의 초자연적인 파워, 즉 귀신을 보는 힘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언브레이커블>에서는 이러한 소년의 역할을 새뮤얼 잭슨과 브루스 윌리스가 공평하게 나누어 맡고 있는 셈이다. 새뮤얼 잭슨은 어떤 사고에도 절대로 깨지지 않는 절대적 존재를 찾고 그 해답은 바로 언브레이커블, 데이비드 던이었다.

<와이드 어웨이크>에는 필사적으로 절대적 존재를 찾는 샤말란의 내면에 해답이 될 법한 대사가 여러 개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가톨릭학교에 다니고 누나와 의사 부모를 둔 조슈아는 바로 나이트 샤말란의 유년기 그대로의 설정이기 때문이다. 조슈아는 절친한 친구 데이브에게 “나쁜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죽어가. 도와 줄 사람은 없고. 그게 인생살이야”라고 말한다. 이 소년들은 어쩌면 미국 안에서 지극히 이방인이었으며 가족 안에서 그 소외감을 극복했던 인도인 감독 나이트 샤말란의 분신들이 아니었을까? 비록 부유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소수로, 타자로 살아온 이 인도감독은 상대주의적인 이원론을 뛰어넘어 상징계인 현실을 뛰어넘어 ‘모두가 신의 아이들’인 공평한 초자연의 세상에서 마음의 위안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진정 제2의 스필버그가 되고 싶다면

그러나 할리우드는 영화로 도를 닦게 내버려두는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똑같이 83년에 만들어진 와 <간디>를 가장 좋아한다는 샤말란에게서, 제2의 스필버그로서 뛰어난 이야기꾼이 되고자 하는 욕망과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정신세계의 부름이 끊임없이 갈등하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그리고 이 소란스런 불화가 이번에는 나이트 샤말란의 명성에 골절상을 입혔다. <언브레이커블>은 기교적인 면에서는 일취월장했을지라도 이야기와 스타일을 조화시키는 데 실패한, 그래서 더이상 동양적인 정신세계 운운할 수 없게 된 나이트 샤말란의 그림자가 어려 있다. 만약 샤말란이 자신의 이름 안에 깃든 ‘밤’을 좇아 영화의 성자가 되고 싶다면, 그는 이제 창백한 자기복제의 유혹이나 제2의 스필버그가 되고 싶다는 욕망쯤은 초탈하는 대범함을 보여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소년 조슈아, <와이드 어웨이크>를 통해 <식스 센스>를 가진 <언브레이커블>한 감독이 되고 싶다면 말이다.

심영섭/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