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수.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함구했던 삶과 음악에 대한 갈증을 모두 빨아들이기라도 한 듯, 이병우가 선보이는 5번째 독집 음반은 이런 제목을 달고 있다. 95년 <야간비행> 이후 무려 8년. 참 오랜만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이병우는 84년 조동익과 듀오 ‘어떤날’을 결성하고, 포크와 재즈, 뉴에이지를 넘나드는 서정적인 선율, 일상의 풍경과 정서를 세밀하게 담은 노래들로 우리 대중음악의 토양에 낯선 발자국을 남겼던 뮤지션. 89년 <내가 그린 기린 그림은>을 필두로 일렉트릭과 어쿠스틱, 클래식의 경계를 넘어 기타로 표현할 수 있는 음악의 영역을 넓혀온 연주자로 활동해왔다. <그들만의 세상> <세 친구> <스물넷> 등 틈틈이 영화음악을 맡았던 그는, 지난해 장편애니메이션 <마리 이야기>의 음악으로 뜸했던 소식을 잇기도 했다.
어른이 되어버린 바닷가 마을 소년의 추억을 불러내는 음악이 어쿠스틱 기타와 피아노, 관현악과 컴퓨터 미디 음악을 뒤섞은 것이었다면, <흡수>는 기타의 풍부한 음색을 고민하는 개인 작업의 일환. 오보에나 현악 등 이따금 다른 악기를 끌어오거나, 일렉트릭과 어쿠스틱처럼 다양한 기타의 사운드를 겹쳐놓곤 했던 전작들에 비해 클래식 기타의 질감을 실험하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한 듯하다. 대중음악을 하나의 뿌리로 하며, 빈 국립음악대학과 미국 피바디 컨서버토리의 유학생활에서 클래식 기타에 파고들어 기타의 음악언어를 고민했던 흔적이, <흡수>에 역력히 담겨 있다.
가사 대신 음율을 언어로 하는 이병우의 기타 음악에서, 다수의 청중이 일단 감지할 수 있는 것은 막연한 분위기와 정서일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서로 부대끼며 흡수되는 감정을 담고 싶었다는 음반 타이틀의 의도를 단번에 파악하긴 쉽지 않지만, <달려> 연작이나 <어머니> 같은 곡을 듣고 있자면 제목에 대한 공감이 서서히 피어오른다. I, II, III의 세곡으로 나뉜 <달려>는, 기타의 현 사이를 빠르게 오르내리는 음율이 인상적인 음악. 일렉트릭 베이스 기타의 주법을 차용한 기민한 연주와 I보다 II에서 좀더 빨라지며 굵직한 저음부 현을 강하게 튕긴 듯한 음들이 몰아쳐 달리는 이미지의 역동성을 연상하게 한다. 순서대로 사람-기차-자동차의 달리는 판타지에 대한 곡이라는 설정을 모른다 해도, 튕겨 올라 부딪쳐 내리는 음들의 생동감이 매력있다.
한편 <어머니>나 <인연>은 이병우 특유의 서정적인 감성의 선율과 베이스 라인의 조화가 돋보이는 곡들. 가는 고음을 부드럽게 울리면서 애틋하고 다감한 멜로디로 사랑의 여운을 느끼게 하는 곡들이다. <춤추는 물개> 역시 일렉트릭 베이스 기타의 주법으로 팽팽히 당겼다가 뜯는 듯한 저음과 뒤뚱거리는 물개의 춤 동작인 양 밀고 당기는 훵키한 리듬이 익살맞은 느낌으로 어울려 있다. <새벽 세시>와 영화 <스물넷>의 삽입곡이기도 한 <방>은 장조와 단조의 미묘한 경계를 오가는 선율, 힘을 뺀 여린 아르페지오가 쓸쓸한 서정을 풍긴다. 몽환적인 현의 울림이 그립고 아스라한 유년의 기억처럼 다가오는 <꿈과 스케이트>와 가벼운 허밍이 들어간 동명 타이틀곡, 가끔 쉬어가는 숨소리처럼 삐걱대는 기타줄 소리까지, 세련된 테크닉과 그 손길 끝에서 빚어지는 정서는 클래식 기타음의 풍요로움과 함께 서른아홉 무렵 이병우의 지나온 자취에 대한 은근한 고백을 담고 있기도 하다. 황혜림 blauex@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