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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만난 겨울의 정령, <고양이를 부탁해>의 옥지영
사진 이혜정김혜리 2001-05-01

“에취!”하얗고 가느다란 몸이 영락없이 한 줄기 카라 꽃을 닮은 소녀가, 어울리지 않게도 꽃가루 알레르기라며 연방 재채기를 해댄다. 혹시 봄에 대한 알레르기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 창백하다 못해 반투명한 피부,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텅 빈 눈동자. 바람 끝이 매웠던 <고양이를 부탁해>의 촬영지 월미도에서 처음 마주친 옥지영(21)은, 겨울의 정령 같았다. 누군가 쓸어안지 않으면 동화 속 눈의 여왕이 세상 끝까지 유괴해 갈 것만 같던 그날의 소녀는, 무척 가난하고 무척 자존심 세고 많이 슬픈 날이면 우는 대신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는 극중 배역 지영이 그대로였다.

그러나 봄 햇살이 졸고 있는 카페에서 다시 만난 옥지영은 딴판이다. 고양이 캐릭터가 그려진 손거울을 꺼내 재채기 뒤끝을 수습하자마자, 중1 때 일년 새 키가 25cm 커서 등이 ‘텄다’고, 만화 <유리가면> 보고 연기에 반했다는 이야기 꼭 써달라고, 돈 많이 벌어서 제주도에 동물 고아원을 세우는 게 꿈이라고 종달새마냥 지저귄다. “그럼 그날 현장에서는 춥고 배고파서 우울했던 건가요?” “저 추운 거 되게 좋아하고 배고픈 건 아주 잘 참아요! 영화에서 지영이가 화가 나 있어서 저도 종일 그랬던 거예요.” 이 아가씨, 정말 열심이다.

패션계에서는 벌써 톱모델로 불렸다는 옥지영이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나온 것에 의아해 했더니, 자기는 개성파도, 굉장한 미모도 아니라 ‘센’ 옷을 입어야 어울리지만, “오늘은 모델이 아니라 나 자신을 말하는 배우로 나온 자리니까”라고 가르쳐준다. 김태용, 민규동 감독의 <열일곱>에도 모습을 담았고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오디션에도 응했지만, 이것이 배우로서 첫 인터뷰. 숙제장 검사받는 초등학생처럼 수줍음 반 자랑 반 연기관도 펼쳐 보인다. 어려운 쪽은 단연 모델보다 영화배우. 주어진 공간을 표정과 포즈로 온전히 지배하는 패션사진 촬영과 달리, 연기는 조금만 움직이면 초점나갔다고 제동이 걸리고 생각과 말을 동시에 해야 하니 곤욕이다. 정답을 일러주면 좋으련만 정재은 감독의 충고는 늘 질문에 가깝다. 그래서 요즘 옥지영은 궁리가 많다. 영화 속 지영이가 왜 그랬을까. 결국 어디로 갔을까. 하지만 스물한살 옥지영에게 무엇보다 영화는 모델일이 그랬듯 자신과 사랑에 빠지는 법을 배우는 즐거운 수업이기도 하다. 모델이 되고 난 뒤 싫기만 했던 외꺼풀 눈과 껑충한 키의 아름다움을 알았듯, 컷 사인 뒤 모니터를 바라보며 옥지영은 조금씩 발견한다. 내 목소리가 이렇구나, 내 손에 이런 표정이 있구나. 나, 이런 힘이 있었구나.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지영은 고양이를 친구들에게 맨 처음 부탁하는 아이다. 두나 언니와 동갑내기 요원이도 좋은 연기 조교지만, 그래서 그녀의 가장 충실한 단짝은 고양이. 아직 홀로 서는 연기가 버거워, 혼자 찍는 장면에서도 곁을 지켜주는 고양이가 고맙다는 옥지영의 새하얀 손등에 고양이 발톱에 할퀸 상처가 드문드문했다. 앞으로도 생채기가 많이 날 거야. 몹시 쓰릴 때도 있겠지. 그래도 잘 부탁해. 건너편 탁자에서 몸을 늘여대던 고양이 ‘액션이’가 드디어 지루함에 겨운 신음소리를 냈다. 헤어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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