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삶의 주인공
50년대 후반의 국내 모더니즘 문학의 대표작이라고 불리는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는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로 시작된다. 내 기억에 버지니아 울프라는 인물에 대해 내가 처음으로 인지한 것은, 바로 그 시에서부터였다. 그러나 워낙 어린 나이여서 라디오를 통해 그 시를 접했을 당시엔, 문맥상 왜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가 거론돼야 하는지를 그리고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전혀 알 수 없었다. 그저 뭐 우수에 젖어 글을 썼을 것 같은 여류 작가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 고작이었던 것. 그랬으니 ‘버지니아 울프가 실존했던 인물이기는 할까?’라는 생각을 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다 그녀의 실체에 대해 조금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영화 <올란도>를 보고나서였다. 원작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영화 자체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구성으로 인해 작가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 그제야 그녀가 전통적인 소설작법에서 벗어나 그 유명한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남성과 여성의 이분된 질서를 뛰어넘는 문학을 선보인 인물이라는 것을 알았고, 제2차 세계대전 즈음에 불어닥친 지식인들의 허무주의적인 분위기를 대변하듯 강물에 투신자살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비로소 <목마와 숙녀> 속에서 무의미한 이름으로만 존재했던 버지니아 울프라는 작가의 존재가 밝혀진 것.
이번에 개봉된 영화 <디 아워스>는 바로 그 버지니아 울프를 매개로 이어지는 세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영화의 원작은 마이클 커닝햄이라는 작가의 동명 소설.
▶ 버지니아 울프의 젊었을 때 사진.
▶ 촬영장에서의 니콜 키드먼과 감독 스티븐 달드리
▶ 마이클 커닝햄의 원작소설 <The Hours>의 표지와 원작소설 <The Hours>를 쓴 마이클 커닝햄.
국내에서는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세월>(The Years)과 같은 <세월>로 제목이 붙여져 출간된 이 소설은, 1999년 마이클 커닝햄에게 퓰리처상을 안겨준 작품이기도 하다. 국내에 출간된 이 소설의 리뷰 또한 “마이클 커닝햄의 <세월>은 단순한 패러디의 한계를 넘어 울프를 더욱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문학적 의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의 언론이 ‘커닝햄이 울프와 대결했다’고 말하며 그 용기와 기량을 칭송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라며, 이 소설의 위상에 큰 의미를 부여해주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 그리고 그녀의 소설들과 영화의 원작소설이 가지고 있는 관계 때문에, 마이클 커닝햄은 그 영화의 개봉과 동시에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다. 그때마다 그에게 수많은 질문이 쏟아졌을 것은 당연한 일. 그중에서도 핵심적인 질문은 “왜 버지니아 울프와 같이 음울하고 너무 심각하고 심지어는 무섭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사람의 이야기와 작품을 기반으로 현대소설을 쓰셨나요?”였다. 그런 경험 때문인지 커닝햄은 영화 공식홈페이지에 아예 ‘왜 버지니아 울프인가?’(Why Virginia Woolf?)라는 글을 올려놓았다. 그 글에서 커닝햄은 ‘그녀는 누구나 한 사람 한사람 모두 자신의 삶이라는 서사에서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나는 그런 그녀에 대한 사랑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세상에는 겉에서 보이는 것처럼 평범한 삶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두가 놀랍기만 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깨우쳐준,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오마주로 소설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버지니아 울프에 빠지게 된 데는, 재미있는 뒷이야기가 있었다. 록에 빠져 살던 15살 고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잘 나간다던 한 여학생이 그에게 <댈러웨이 부인>을 던져주며 ‘이제 그만 좀 멍청하게 살아라’라는 말을 했던 것. 그저 그 여학생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 책을 읽기 시작했고, 책을 덮는 순간에는 ‘지미 핸드릭스가 기타로 했던 것을 버지니아 울프는 글로 해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미 핸드릭스가 했던 그 무엇을 직접 해보기 위해, 그 스스로도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뒤 여러 편의 작품을 쓴 뒤 그는 버지니아 울프를 직접 등장시키는 <세월>을 집필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완성된 소설에 영문 제목 <The Hours>를 달았다. 제목을 <The Hours>로 정한 데도 물론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그의 특별한 애정이 담겨져 있다. 그 제목을 버지니아 울프가 <댈러웨이 부인>의 가제로 썼다가 폐기했다는 것을 알고는, 언젠가 반드시 자신의 작품 제목으로 쓸 것이라 별러왔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대단한 애정에 기반해 쓰여진 작품이었기 때문에, 커닝햄이 소설의 영화화를 크게 탐탁지 않아했던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미국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로서 할리우드에서 영화화 제의가 들어오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아니었다고 스스로 밝히긴 했지만, 처음엔 걱정이 오히려 앞섰던 것이 사실. 하지만 그런 걱정 때문인지 영화는 원작에 누를 끼치기는커녕, 오히려 소설로는 전달할 수 없었던 등장인물들의 세밀한 부분들까지 살려내는 데 성공적이었다는 평가까지 받았다. 그런 의미에서 <디 아워스>는 커닝햄의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시간을 초월하는 애정을 이해하면서 감상해야 제맛이 나는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철민/ 인터넷 칼럼니스트 chulmin@hipop.com
<디 아워스> 공식 홈페이지 : http://www.thehoursmovie.com
<디 아워스> 한글 공식 홈페이지 : http://www.thehours.co.kr
영국 버지니아 울프 소사이어티 페이지 : http://orlando.jp.org/VWSGB
저자 마이클 커닝햄 사이트 : http://www.literati.net/Cunningh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