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만화, 프랑스에 서다(1)
2003년 1월23일부터 26일까지 4일 동안 만화를 사랑하는 20만명의 관람객은 인구 7만명의 작은 성곽도시 앙굴렘을 찾았다. 작은 강이 흐르고, 성곽에 둘러싸여 있어 걸어서도 어디로든 이동이 가능한 작은 도시는 4일 동안 마술처럼 만화적인 분위기로 탈바꿈한다. 아마 페스티벌 기간이 아닌 평소에 앙굴렘을 찾아본 사람은 고즈넉할 정도로 조용한 도시 분위기에 놀랄 것이다. 그처럼 도심은 신비할 정도로 완벽한 모습으로 변신한다. 주차장에 거대한 임시 가설 전시장이 들어선다. 이곳은 프랑스 대형 출판사들이 독자를 만나는 장소다. 버스 정거장을 사이에 두고 북쪽 부스와 남쪽 부스로 나뉜다. 다르고, 위마노이드, 카스테르망, 글레나 등 10여개에 이르는 대형 출판사들은 3×3의 기본 부스 수십개를 활용한 대형 부스를 개설해 만화책을 팔며 작가 사인회 등을 개최한다. 물론 독립적인 출판사들도 1∼2개의 부스를 구매해 자사의 만화를 홍보하기도 한다. 올해도 이곳 상업 부스는 전통적인 대형 출판사들의 물량공세와 함께 일본 만화 전문 출판사들의 약진도 여전했다.
상업 부스를 지나 도심 중심부의 시청으로 향하자면, 프레스센터를 지나면 생 마르셀 교회와 넓은 광장이 나온다. 평소에는 광장을 낀 경마카페의 앞마당으로 활용되거나 아니면 100여년이 넘은 상가거리에 활력을 주는 역할을 하다 축제기간에는 120여평의 임시 텐트가 가설되어 훌륭한 전시장으로 변모한다. 도심의 중앙부, 이곳에서 4일 동안 한국 만화가 유럽의 독자들을 만났다. 한국 만화로는 처음 시도해 본 말걸기였다. 한국 만화가 드디어 프랑스에 서게 된 것이다.
한국 만화의 역동성
2003년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은 30주년이라는 숫자의 무게처럼 뜻깊은 행사들이 연이어 개최되었다. 기획단계에서부터 주목받은 2개의 카드는 전년도 그랑프리를 수상한, 그래서 이번 해에 대회장을 맡은 프랑수아 스퀴텐의 전시회와 CNBDI가 새로운 만화박물관을 건립하기 이전 여러 관람객에게 몇년 동안 지속적으로 공개할 5개의 주제가 연속적으로 구현된 상상박물관이었다. 한 도시에 둥지를 틀고 있어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는 페스티벌조직위원회와 CNBDI가 내세운 간판스타이자 대표주자인 셈이다. 이 틈바구니를 뚫고 들어간 전시가 바로 한국만화특별전이었다. 지난해 12월, 파리 인류학박물관에서 있었던 기자회견장에서 공식적으로 배포된 이번 페스티벌 보도자료의 두 번째 전시로 소개된(첫 번째는 스퀴텐 전시) 한국만화특별전은 프랑스 언론과 독자들에게 일종의 문화적 충격을 주기에 충분한 기획이었다.
19인작가전 중 박흥용(왼쪽). 최인석 작가의 설치작품에 직접 참여하는 관객(오른쪽).
프랑스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국은 세계의 변방에 위치한 나라이면서 도대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정치사회적 격변을 살아가는 나라이거나 아니면 그동안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는 나라였을 것이다. 아마 후자가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획단계부터 고심한 프랑스 관객과의 조우는 예상 외로 쉽게 진행되었다. 프랑스 관객은 전시기획자들의 의도에 충실히 따라주었다. 빠르게 읽어가야 할 전시물은 빠른 속도로 읽어갔고, 한 작가의 작품을 꼼꼼하게 읽어나가야 할 자리에서는 독해의 속도를 늦춰주었으며, 참여해야 할 곳에서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한국 만화의 역동성’이라는 제목으로 준비된 한국만화특별전은 전체 전시 도입부에 짧고 명확하게 읽어가는 역사전을 배치했다. 역사전은 2개의 층위로 구성되었다. 각각 시대를 대표하는 사진을 배경으로 그 앞에 철망이 배치되고 거기에 캐릭터나 복제된 만화페이지가 전시되었다.
만화역사전(위). 에르제 거리 명명식 장면(아래).
전시 텍스트는 최대한 간략하게 제작되었으며, 시대를 대표하는 만화들이 최소한으로 선정되었다. 초기 기획은 역사전을 풍부하게 진행하는 쪽이었다. 프랑스 독자와 만나는 첫 전시회로 한국 만화 역사의 자산을 충분히 홍보하자는 의도였다. 그러나 한국 만화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표현하는 시나리오 작업 중 역사전을 최소화시켜 진행하기로 결론이 났다. 미리 준비한 30여명의 작가들의 작품 중 최후로 전시물을 골라냈고, 나머지 작가들은 도록에 수록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짧은 역사전과 함께 이번 전시의 중심은 19인 작가전이다. 19인 작가전은 역사전과 8명 작가 갤러리를 통합·재조정한 것으로, 오늘의 한국 만화를 대표하는 다양한 경향의 작가 19명을 골라 11명은 공통된 모듈에 일정한 전시표현의 방법으로, 나머지 8명은 작가가 직접 디자인하고 만드는 작가 갤러리 형식으로 전시가 준비되었다. 19명은 작품의 성격에 따라 ‘만화와 욕망’(양영순, 이유정, 권가야, 박흥용, 윤태호), ‘일상의 발견’(이우일, 홍승우, 최호철, 고경일, 박희정, 이강주), ‘새로운 감수성’(아이완, 이애림, 정연식, 이향우, 권윤주, 최인선, 변병준, 곽상원)으로 준비되었다. 19인 작가전이 끝나는 지점에서 학생전와 모바일만화전이 준비되었다. 그리고 한국 만화 특유의 여유와 만화방이라는 독특한 공간적 이미지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널찍한 평상 4개가 준비되었고, 거기에는 자유롭게 만화를 볼 수 있도록 책이 비치되었다.
어찌 보면 한 전시에 담아내기에 무리일 네 가지 성격의 전시를 한 공간에 배치했다. 과거의 만화는 역사전으로 오늘의 만화는 작가전으로, 미래의 만화는 학생전과 모바일만화전으로 각각 차별화된 성격을 부여했다.
만화는 망가가 아니다
이번 전시는 의외로 대호황을 이루었다. 프랑스 관객은 연일 전시장을 찾았고, 모든 전시물을 기획자가 의도한 대로 즐겨주었다. 출판관계자들이나 만화가, 교수 등등은 구체적인 작가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프로젝트 단위로 보자면 프랑스에는 없는 장르인 모바일만화전은 현지 언론과 관객에게 높은 호응을 얻었다. 작가 단위로 보자면 작가 갤러리를 구성한 젊은 작가들의 창의성과 최호철 등의 놀라운 드로잉, 박희정의 독특한 스타일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현지 언론은 대단히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스드에스트>는 “만화는 망가가 아니다”라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한국 만화가 일본 만화가 아닌 자기정체성을 지닌 작품세계라는 점을 인정하기도 했다. 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
(*한국전 평가 및 다른 전시소개는 다음호에 계속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