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를 가불하지 말라
나는 장이모의 영화는 다 본다. 적어도 본전 생각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소재를 다루든 그의 영화에는 복사해서 걸어두고 싶은 그림 몇점이 있고, 연애편지 쓸 때 슬쩍 끼워넣고 싶은 대사 한두 마디는 있다. 그리고 늘 공리가 있었다. 남성의 소유욕을 난폭하게 자극하는 미모는 흔하지만 선의를 불러일으키는 미모는 드물다. 초기의 공리는 남자를 선량하게 몰입시키는 들꽃 같은 느낌이 있었다.
물론 <영웅>에는 공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전혀 본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기원에서 장천이 진나라 검객을 물리치는 장면에서 나는 이미 7천원을 다 지불해 버렸다. 호수에서 파검과 무명이 벌이는 검무나 진나라 사수들이 만들어내는 화살비는 마일리지 덕분에 덤으로 얻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영화가 끝까지 그렇게 나가주기를 바랐다. 예상대로 감독은 <라쇼몽>의 미로에서 시작해서 화려한 색채의 연금술과 스펙터클로 나아간 다음, <와호장룡>의 로맨스로 마감질을 한다. 도대체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그런데 장이모는 한 발짝 더 나아간다. 그는 친절하게도 네 영웅의 빛나는 검술과 기개가 결국은 천하통일을 위한 전야제였음을 밝힌다. 무명은 천하통일의 전진기지인 황궁의 성문을 등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축복으로 받아들인다. 이 순교의 이미지 자체는 분명 감동적이다. 그런데 나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건 순교의 탈을 쓴 순장이었기 때문이다. 순교는 핍박받고 남루한 것들을 위한 소리없는 희생이지 ‘대의’의 폭력과 교설로 개인을 매장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죽음까지 파고들었던 파검과 비설의 러브신도 이미지 자체는 아름다웠다. 평소 같으면 감동의 눈물이 줄줄 새어나올 만했다. 애인의 칼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남자, 그 남자를 등 뒤에서 껴안고 칼을 자신의 뱃속으로 밀어넣는 여자, 이것만큼 견고한 사랑의 이미지가 어디 있겠는가. 감언과 이설로 포장된 제도 속의 사랑과 동어반복하는 일상의 섹스를 단칼로 경멸해버리는 검객의 사랑에 어찌 미적 쾌락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이 장면에서도 별 감흥이 없었다. 두 남녀를 탯줄처럼 이어주는 그 칼은 사막 위에 ‘천하’라는 글씨를 새기던 칼이다. 사랑조차도 천하통일을 위한 칼에 바쳐지니, 사실 이 영화의 모든 이미지는 선전 포스터이다. 나는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덤으로 받았다고 생각하고 즐겼던 화려한 이미지들이 사실은 공짜가 아니란 사실을. ‘대의’라는 이데올로기의 수용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이 영화가 결국은 ‘대의’를 수용하지 않으면 아무런 미적 쾌락을 얻을 수 없는 구조라는 것을.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는 빨리 천하통일을 이루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절대적 권력을 누군가에게 위임해야 한다는 논리는 정말 지겹다. 성장기 때부터 <새마을노래>만큼이나 시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들었다. “다시는 나와 같은 불행한 군인이 없기를 바란다”고 눈물을 찍어냈던 사람도 비슷한 논리를 폈다. 이 논리는 인간이 원하는 방향으로 역사를 끌고 갈 수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실재 역사는 그 불행한 군인이 예측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더욱더 불행한 군인이 두명이나 더 나왔다.
런던 도서관에서 8년 동안 머리를 싸매고 역사발전의 시나리오를 썼던 마르크스도 확신을 하진 않았다. “인간은 자기 손으로 역사를 만들지만, 원하는 방향으로 역사를 만들진 못한다”는 그의 탄식은 역사가 단순히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는 데 대한 인정이다. 헤겔은 역사와 개인의 불협화음을 ‘역사의 간지’란 말을 쓰면서 역사의 손을 들어주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역사는 개인의 의지나 도덕과는 무관하게 자신의 논리로 진화한다는 언명은 얼핏 대의의 손을 들어주는 것 같지만, 그 대의는 인간의 입으로 말해지는 대의가 아니다. 헤겔은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역사의 대의를 두기 위해, 그 대의의 가차없는 의지를 인간이 수용하도록 만들기 위해, 역사의 대의에 절대정신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 사람들에게 배울 점이 있다면 아마도 이런 것이리라. 인간은 대의를 가불해서는 안 된다.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에는 유대인을 구해주는 독일군 장교 호센펠트가 나온다. 빈집에서 맞닥뜨린 유대인 피아니스트 스필만에게 연주를 청한 그는 거지 몰골의 유대인이 치는 쇼팽의 <야상곡 C#>를 묵묵히 듣고 있다가 살려주기로 마음먹는다. 결코 음악에 감동해서가 아니다. 죽일 사람을 단지 음악에 반해 살려준다는 것은 인간보다 음악을 우위에 두는 파시즘적 정서다. 그는 이전에도 유대인을 여럿 살려준 경험이 있다. 전쟁이 끝나고 스필만은 호센펠트를 찾아다녔지만 결국은 만나지 못했다. 소련군의 포로가 된 호센펠트는 스탈린그라드의 수용소에서 고문으로 사망한다. 그는 국가사회주의(나치즘)에 의해 동원되고 볼셰비즘에 의해서 희생된 사람이다. 전쟁 중에 쓴 그의 일기에는 역사적 대의에 대한 회의로 가득하다. 아무래도 대의의 광풍은 아무것도 만들지 못하는 모양이다.
스필만의 살아남은 슬픔과 호센펠트의 보상받지 못한 선의,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아득한 폐허 혹은 평화. 그 사이에서 나는 무언가 자꾸 찾고 싶어진다. 대의를 가불해서 안 되는 것은 역사가 그런 남루한 것들의 힘으로 저 홀로 꾸역꾸역 나아가고 있기 때문일 게다. 남재일/ 고려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