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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영화 <디 아워스>
2003-02-18

세 여인이 어느날‥사는게 무서워졌다살다보면 그런 날이 있다. 혼자 차를 몰고 가다가, 또는 발디딜 틈 없는 인파에 섞여있다가 온 세상이 순간 멈춰지며 지나온 삶이 죽음보다 무서워질 때, 이유없이 왈칵 몰려오는 절망감에 죽거나 떠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그런 때가 말이다. 2001년의 뉴욕에 나타난, 아이들과 남편을 훌쩍 버리고 떠났던 1951년의 로라는 이렇게 말한다. “죽음같은 현실에서 난 삶을 찾아 간 거에요.”울프의 소설을 중심축 삼아<디 아워스>는 영원처럼 느껴지는 세 여인의 하루를 교차하며 나직히 삶의 성찰을 들려준다. <빌리 엘리어트>의 스티븐 달드리가 감독을 맡았고, 99년 퓰리처상 수상작 마이클 커닝햄의 <세월>이 원작이며, 베를린영화제에서 주연여우상을 공동수상했고, 지난해 대부분의 미국비평가들(유독 <타임>만이 “감정적이며 젠 체한다”며 최악의 영화로 꼽았다)이 꼽은 최고의 영화이며, 아카데미 시상식의 9개 부문 후보… 라는 수많은 화제조차 이런 성찰 앞에선 무색해진다. 이 순간, 당신 안에서 울리는 소리가 가장 절박할 터이니.세 여인은 울프의 소설 <델러웨이 부인>으로 엮여 있다. 신경을 끊어버릴 듯한 우울증과 정신질환을 피해 1923년 시골로 온 울프(니콜 키드먼)는 어느날 <델러웨이 부인>의 첫줄을 쓰고 있고, 1951년 어느날 미국 남부에서 귀여운 아들과 자신을 끔찍히 사랑하는 남편과 사는 로라(줄리언 무어)는 <델러웨이 부인>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1년 어느날 에이즈로 죽어가는 자신의 첫사랑 리처드를 몇년째 돌보고 있는, ‘델러웨이 부인’이라 불리는 뉴욕의 레즈비언 편집장 클래리사(메릴 스트립)는 <델러웨이 부인>의 유명한 첫장면처럼 꽃을 사러 간다.몇십년의 세월을 건너 뛴 여인들의 삶은 어딘가 닮아있다. 자신을 극진히 사랑해주는 레너드를 두고서도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영혼에 사로잡힌 울프나, 남편의 생일케이크를 만든 날 약병을 쥐고 호텔방에 들어가 자살을 시도하는 로라나, 자신의 눈 앞에서 리처드가 뛰어내려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목격한 클래리사는 가눌 길 없는 자기 삶에 대한 갈망에 부딪친 이들이다. “삶을 피한다면 평화를 찾지 못할 것”이라던 울프가 1941년 주머니에 돌을 집어넣고 워즈강을 향해 걸어들어가 스스로 생을 마감함으로써 삶을 지속하고자 했다면, 로라는 둘째 아이를 낳자마자 가출했고, 클래리사는 그제서야 자신의 삶을 깨닫는다.키드먼, 무어, 스트림을 만난다울프가 그랬듯이, 영화는 평범해 보이는 일상 아래 숨겨진 인간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며 관계와 스쳐지나간 행복에 대해 무수히 쏟아지는 의식의 소나기를 그릴 뿐이다. 하지만 느리고 침울한 일상 사이 눈부시게 다가오는 영화속 6월의 햇살처럼, <디 아워스>는 짙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 너머로 희망을 이야기한다. 친절한 설명없는 인물들의 고뇌가 당혹스럽거나 페미니스트의 전유물처럼 보인다면, 넘치는 감성이 과도하게 보인다면, 당신 또한 문득 느꼈지만 말로 꺼낼 수 없었던 고독과 절망 그리고 삶을 떠올려보라. 정교한 시간교차와 절제된 편집부터 세월의 강을 휘감는 필립 글래스의 반복되는 피아노 선율까지 잊을 수 없는 영화, 그중에서도 가장 ‘황홀한 경험’은 매부리코까지 붙여가며 열연한 키드먼과 힘겹게 짓는 웃음 속에 깊은 슬픔을 띄우는 무어, 꾸역꾸역 삼켰던 울음을 터뜨리는 스트립 세 배우를 한 작품에서 만난다는 사실일 것이다. 21일 개봉.

김영희 기자 do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