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키우다보면 참 다양한 것들에 대해 알게 된다. 결혼 전, 아니 아이를 키우기 전까지는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것들에 민감해지는 것. 이름도 이상한 은물이니 금물이니 혹은 가베니 하는 교재에 대한 이야기가 신문이나 TV에서 나오면 귀가 솔깃해지는 것이 그 좋은 예다. 또한 메이지, 블루, 까이유, 아추, 뿡뿡이 등의 캐릭터에 훤하게 되고, 심지어는 그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이나 TV프로그램의 주제곡을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는 경우도 있다. 한동안 우리나라 부모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는 <I SPY>라는 유아용 책도, 그와 비슷한 이유로 알게 되었다. 다양한 사물들이 어지럽게 배치되어 있는 사진 위에서 일종의 숨은 그림 찾기 놀이를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그 책의 내용이었는데, 워낙 재미있는 사물들을 화려하게 배치해놓고 있어 책을 딱 펴보는 순간 왜 그렇게 인기를 끌었는지는 한눈에 알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 <I SPY>는 미국에서도 베스트셀러로 인정받으며 여러 가지 버전으로 출시되었는데, 그런 인기의 원인 중 책 제목이 부모들에게 너무 친근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부모 세대들이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바로 책의 내용을 궁금해하게 마련이었고, 책의 내용도 그런 관심에 부응하는 수준이었다는 것. 제목에 대해 부모들이 느끼는 친근감의 근원은 얼마 전 개봉된 동명의 영화 <아이 스파이>와 연결되어 있다. 에디 머피와 오언 윌슨이 주연한 그 영화의 원작이 1960년대 후반 미국을 강타했던 동명의 TV시리즈였던 것. 그 TV시리즈를 통해 미국인들의 뇌리에 강력하게 각인되어 있었던 <아이 스파이>가 유아용 도서의 제목으로 출간되었으니, 시선을 끄는 것은 당연했다고 할 수 있다.
→ 유아용 숨은 그림 찾기 책 <I SPY>.→ 94년에 TV영화로 만들어진 <아이 스파이 돌아오다>의 포스터.→ DVD로 출시된 <아이 스파이> TV시리즈의 표지.(왼쪽부터)
1965년 처음 방송을 탄 <아이 스파이>는 백인과 흑인 짝패로 이루어진 미국 CIA요원들이 전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임무를 수행한다는 내용이다. 당시로서는 흔하지 않았던 흑/백 짝패 주인공을 연기한 이들은 빌 코스비와 로버트 컬프다. 지금의 빌 코스비야 더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대코미디언이지만, 당시에는 뉴욕의 나이트클럽에서 스탠드업코미디를 하다가 발탁된 전혀 무명의 배우였다. <아이 스파이>는 그런 의미에서 그의 첫 번째 연기 도전작품이었다. 물론 첫 연기가 매끄러울 리는 없었다. 방영 초기 몇 에피소드에서는 시청자들의 항의가 나왔을 정도. 반면 로버트 컬프의 경우는 그 정반대였다. 연극 무대에서 탄탄한 기초를 닦은 뒤 50년대 말부터 TV에 출연한 베테랑이었던 것. 게다가 첫 번째 에피스드를 비롯한 많은 에피소드의 각본을 직접 쓰고, 몇몇 에피소드는 직접 감독을 했을 정도로 <아이 스파이>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아이 스파이>가 세상에 선보이게 된 뒷이야기다. 그 시작은 1962년 첫 번째 007영화인 <닥터 노>의 성공이었다. 제임스 본드와 같은 첩보원의 상품성을 발견한 TV프로듀서들이 갑작스럽게 첩보물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는데,
→ 리메이크된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오언 윌슨과 에디 머피.→ <아이 스파이> TV시리즈의 주인공이었던 로버트 컬프와 빌 코스비.(위부터)
그때 방영을 시작한 TV시리즈에는 007의 아류인 <The Man From U.N.C.L.E.> 그리고 시대적 배경을 뒤튼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가 있었다. 그런 흐름 속에서 첩보원은 첩보원이되 좀 색다른 소재를 찾던 프로듀서 셀던 레너드는, 나이트클럽에서 코미디를 하고 있는 빌 코스비를 발견하고는 웃기면서 따스함이 있는 첩보원으로 그를 등장시키는 TV시리즈를 구상하게 된다. 문제는 빌 코스비가 흑인이었다는 점. 그래서 선뜻 그런 구상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던 셀던은, 어느 날 로버트 컬프를 주인공으로 하는 첩보물이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그의 짝패로 빌 코스비를 붙이는 모험을 감행한다.
그 과정에서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이자 CIA요원으로 등장하는 로버트 컬프의 짝패로 예정되어 있던 조지 래프트라는 백인 노인 배우가 밀려나게 된다. 그리고 빌 코스비가 로버트 컬프의 개인 트레이너라는 가짜 신분으로 활동을 하는 CIA요원으로 설정된다. 물론 그런 설정에 <NBC>는 엄청나게 반대했다. 흑인이 백인과 동등한 첩보요원으로 등장하는 TV시리즈가 성공하리라고는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NBC>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시리즈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초반이 지나 연기의 안정을 찾은 빌 코스비도 스타가 되어버렸던 것. 방영 시작 이듬해에 에미상은 그렇게 빨리 연기 감각을 익힌 빌 코스비에게 남우주연상을 주었을 정도다.
여하튼 그런 과정을 통해 최고 인기 TV시리즈로 군림했던 <아이 스파이>는 정확히 3년 뒤인 1968년 9월 종영하면서 전설로 남게 된다. 그뒤 약 26년이 지난 1994년 <아이 스파이 돌아오다>가 TV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이미 할아버지가 된 로버트 컬프와 빌 코스비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일부 올드 팬들로부터, ‘제발 과거의 좋은 추억을 망치지 마라’라는 반응이 나왔을 정도. 상황이 그러했으니 에디 머피 주연의 <아이 스파이>에 대해 팬들이 우려 반 기대 반으로 개봉을 기다렸던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안타까운 점은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고,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는 것이다.이철민/ 인터넷 칼럼니스트 chulmin@hipop.com
→ <아이 스파이> TV시리즈 팬페이지 : http://ispy65.tripod.com
→ <아이 스파이> TV시리즈 팬사이트 : http://www.thermodynamic-online.com/ispy
→ 영화 <아이 스파이> 공식 홈페이지 : http://www.sonypictures.com/movies/isp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