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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부조리함! <아이 스파이>

아가씨,<아이 스파이>를 보고 `00다움`에 대해 고뇌하다

실은 나는 노력하는 편이다. 기자처럼 보이려고. 천성이 게을러 늘상 노력하기는 어렵지만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는 뭔가 활동적이면서도 지적인 커리어우먼의 이미지를 팍팍 주기 위해 옷도 골라 입고, 화장에도 신경을 쓴다(형편없는 드라마에서 어설프게 여기자를 흉내내는 3류 배우보다 나을 게 없다). 그러면 내 친구들- 전에 말했던 대한민국 1%- 만 천진난만하게 입을 헤 벌리고 감동한다. “우와, 너 꼭 기자 같아.” 나도 흐뭇해져서 재차 확인한다. “정말? 정말이지?” 완전히 <아이 리포터>다.

<아이 스파이>의 알렉스는 평생 스파이 만날 일 없는, 만나도 알아볼 일 없는, 그래서 스파이에 대한 모든 정보는 영화를 통해서만 얻는 사람들에게는 스파이계 전체에 대해 깊은 의구심과 회의를 갖게 하는 인물이다. 고위급 간부 앞에서 차를 마시다 혀를 데어 오두방정 떠는 거야 인간적으로 넘어간다고 해도, 여자보다 가느다란 목소리로 “난 저능아가 아니야, 첩보원이라구” 소리치는 모습을 보면 어이가 없다. 그에게 주어지는 장비를 유능한 스파이 카를로스의 것과 비교하는 장면에서는 그 처량함에 눈물이 날 지경이다(역시 신자유주의적 경쟁질서란 무서운 것이다. 기자들의 장비지급에도 이런 경쟁질서를 도입했다면 지금까지 나는 386 데스크톱을 지게에 지고 다녀야 했을지도 모른다).

왕느끼에 주책덩어리 밝힘증 환자인 오스틴 파워도 있고, 철공소에서 용접하다가 막 달려나온 것 같은 트리플X도 있지만 <아이 스파이>의 알렉스만큼 스파이답지 않은 스파이는 없었던 것 같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알렉스가 스파이라는 직업을 가지게 된 건 어쩌다 우연히는 아닐 것 같다. 트리플X처럼 자신은 관심도 없는데 천부적 재능이 넘쳐서 ‘운명적으로’ 스파이의 길에 입문한 건 물론 더더욱 아니겠지만. 아마도 그는 스파이라는 직업에 매력과 재미를 느꼈을 것이고 학과에서건 실기에서건 과락을 할 성적은 아니었을 테니 스파이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존재의 부조리함이다. 소심한 스파이라니, 근육질의 백혈병환자만큼이나 황당한 단어의 조합 아닌가. 여느 스파이들이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애쓸 때 우리의 알렉스는 노력한다. 스파이처럼, 스파이답게 보이기 위해. 그러면 뭐 하나.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는데. 00답다, 00답게라는 말은 소심한 인간들이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데 정말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이자 동시에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되는 것 같다. 정상에 올리지도 못하는 돌을 죽도록 굴리는 시시포스 같다고나 할까(이렇게 써놓고 보니 엄청 있어 보이는 실존주의적 고뇌인 것 같군. 실존의 고민인 건 맞잖아?). 기자생활 8년째에 아직도 기자처럼 보이기 위해 전전긍긍하면서 가끔씩 “기자가 뭐 그래요?” 하는 말 한마디로 마음 한구석이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나를 봐도 그렇다. 직업뿐인가. 미장원에 갈 때마다 “어려 보이게 해주세요”라는 주문을 쪽팔리는 줄도 모르고 반복하며 아가씨답게 보이기 위해 처절한 노력을 하지만 버스에서 “아줌마 100원 더 내셔야 돼요”라는 말을 들을 때 버스를 폭파시켜버리고 싶은 충동이 가슴 저 바닥에서부터 용솟음치는 건 또 어떤가. 재미있는 건 이 영화를 보면서 어리버리 스파이 알렉스에게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끼면서 동시에 알렉스를 연기했던 오언 윌슨과도 강한 연대감을 느꼈다는 거다. 오언 윌슨을 개인적으로 전혀 모르지만(알 턱이 있나) 그도 역시 의욕은 있지만 체질이 안 받쳐주는 소심한 배우임에 틀림없다. 이 혐의를 포착한 건 <아이 스파이>와 며칠 차이로 본 <샹하이 나이츠>의 마지막 NG장면에서였다. 파트너인 장 웨인(성룡)과 다투는 장면에서 로이(오언 윌슨)가 인신공격적인 악담을 퍼붓는데 이 대사를 하면서 오언 윌슨이 “이건 너무 잔인해”라며 중간에 자꾸 머뭇거리는 것이다. 그 순간 ‘도대체 얘 배우 맞냐’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찌나 반가운지. 흐흐.

스파이계조차 제임스 본드들만의 판이 아니라는 것도 <아이 스파이>라는 영화를 통해 폭로됐지만 생각해보면 어떤 직업군이든지 스테레오 타입화된, 00다운 인물만 있는 건 아니다. 내 주변만 봐도 그렇다(하긴 내 주변이니까 그렇겠지). 그러나 알렉스나 나나 아마도 죽을 때까지 00답게 보이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할 것이다. 결코 성공하지 못하겠지. 그렇지만 시시포스가 돌 굴리는 게 언제 의지의 문제였나. 팔자의 문제였지.김은형/ <한겨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