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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주의 벗어나니 편해졌다˝,<블루> 감독 이정국 [1]

1997년 서울 관객 80만명을 불러모은 흥행작 <편지>와 2000년 잠시 극장에 걸렸다 조용히 간판을 내린 <산책>은 참으로 대조적인 영화였다. 하나는 지나치게 울렸고 다른 하나는 지나치게 잔잔했다. 그래도 두 영화가 같은 감독의 손길에서 나온 것은 분명했다. <편지>와 <산책>의 밑바닥에 요즘 젊은 감독의 영화에서 찾기 힘든, 70∼80년대풍 감성이 흐르는 걸 부인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 이정국 감독이 이번에 만든 영화가 ‘해양액션’이라는 선전문구를 달고 있는 영화, <블루>다. <유령>을 만들 때 썼던 ‘드라이포웨트’라는 특수 촬영기술을 동원한 영화, 해군의 전폭적 지원을 받은 대작, 두 남자의 우정과 갈등이 중심이 되는 작품, 여러 가지 면에서 <블루>는 이정국 감독과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선입견을 갖게 한다. 국내에서 전례가 별로 없는 해양액션영화의 감독이라면 당연히 젊고 감각적인 테크니션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하지만 <블루> 시사회장으로 향하면서 들었던 그런 우려는 영화를 보는 동안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여러 대의 전함이 등장하고 함포사격을 하는 훈련장면을 생생히 담고 있지만 <블루>는 스펙터클로 승부하는 영화가 아니다. 관객의 시선을 캐릭터의 매력에 집중하게 만들겠다는 감독의 선택은 옳다. 신현준이 연기하는 김준 대위를 보면서 폭소와 미소가 엇갈리는 순간을 경험하는 동안, 관객은 장르의 게임에 동참하게 된다. 시사회장을 나서는 관객이 여기저기서 “별로 기대 안 했는데 재미있다”고 말하는 걸 듣노라니 이정국 감독이 스스로 설정한 한 가지 목표만은 확실히 이뤘다는 게 느껴진다. 제작비 규모에 짓눌리지 않는 가벼운 영화, <블루>는 한국형 블록버스터 이전에 한국형 팝콘무비로 불려야 마땅하다. 여전히 구식 감성이 배어나고 세련된 맛은 없지만 <블루>는 장르영화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 미덕에 충실하다. 예상대로 진행되는 데 장르의 공식을 좇는 동안 예기치 않은 즐거움을 만나는 것이다.

2월3일 저녁 8시50분에 시작된 <블루> 시사회를 보고 이정국 감독을 만난 것은 밤 11시 무렵이었다. 꽤 오랜만에 만난 터라 반가운 인사를 나누자마자 그는 “흥행이 잘돼야 된다”는 말부터 꺼낸다. “상업영화의 미덕이 관객이 많이 드는 것 말고 더 있느냐”고 스스로 반문하면서. 질문은 어떻게 또는 왜 이 영화를 연출하게 됐는지로 시작됐다.

이번 영화 <블루>는 기획부터 <편지>나 <산책> 같은 전작과 완전히 다르다.

<산책>을 제작한 지오엔터테인먼트에서는 <산책>을 개봉하기 전부터 <블루>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는 나랑 전혀 관계없는 프로젝트였다. 연출제의가 들어온 것은 <산책> 개봉하고 1년쯤 지나서였다. 그게 과연 해군에서 지원을 받을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는데 (영화사에서)다 된다면서 연출을 해달라고 하더라.

그러면 처음엔 전혀 관심이 없는 프로젝트였는데..

초기엔 일반 관객이 생각하는 것처럼 해군 뭘 다뤄, 그러면 국군 홍보영화 되는 것 아닌가, 그런 선입견이 있었다. 나는 특히 재난영화 같은 걸 아주 싫어한다. 아무리 재미있다 해도 재난영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초기 시나리오는 캐릭터는 어느 정도 있었지만 드라마는 (그대로)가기 힘든 거였으니까 내가 관심을 가질 이유가 별로 없었다.

이 작품을 연출하겠다, 결심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이었나? 시나리오에서 어떤 매력을 느껴서였나.

결정적인 계기는 뭐, 의리밖에 없었다. (웃음)

의리?

<산책> 제작해서 손해도 많이 봤는데 영화사가 날 믿어주고 격려해주고 그랬으니까. 그리고 가능성. 이걸로 내 나름대로 어떤 변신을 꾀해보자는 가능성. 그런 다음 여러 차례 회의하면서 시나리오가 좋아지는 게 보였다. 김해곤 작가가 캐릭터와 대사를 감칠맛나게 만들었고 조중훈 작가가 드라마를 짜임새 있게 만들어냈다. 시나리오가 발전하는 걸 보면서 해볼 만하다, 판단한 거다.

흥행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은데 <산책>이 흥행에 실패한 부담감 때문인가.

그런 건 아니다. <산책>은 흥행에 실패했지만 처음부터 각오한 면이 있다. 오즈(오즈 야스지로)를 좋아해서 그런 느낌의 영화를 만들려고 한 거니까. 단순한 일상에서 삶의 진실을 끌어내는 영화가 됐으면 했던 거다. 하지만 흥행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무엇보다 영화는 대중이 지루하지 않게 봐야 한다는 점 때문이다. 예술영화라고 해도 캐릭터든 주제든 형식이든 뭔가 관객을 끌 수 있어야 한다. 하물며 상업영화라면 관객이 얼마나 드느냐가 제일 중요하다.

이정국 감독의 데뷔작은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부활의 노래>였다. 93년에 제작된 이 영화는 아직 검열의 칼이 시퍼렇던 시대였던 탓에 그를 운동권 감독으로 낙인찍게 만들었다. 그뒤 그는 <두 여자 이야기> <채널69> <편지> <산책> 등을 만들었다. <블루>는 그의 장편영화 필모그래피에서 6번째다. 10년간 6편이라면 많지도 적지도 않는 편수지만 장현수, 김의석, 곽재용 등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감독들이 그렇듯 그도 한편 만들 때마다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조감독을 오래 해야 데뷔할 수 있던 도제시스템이 무너진 90년대 후반, 신인감독들이 대거 등장하는 동안 이정국 감독을 비롯한 중견감독들은 다소 뒷전으로 물러나야 했다. <채널69>의 실패와 97년 <편지>의 성공은 극적인 전환점이 됐다. 처음 흥행에 성공하는 기쁨을 누리면서 그는 “돈이 없어 미뤄뒀던” 결혼도 했다. 전작을 일별해보면 그는 일관된 주제의식이나 스타일이 돋보이는 감독이 아니다. 90년대 초반 데뷔한 감독다운 감수성을 느낄 수는 있지만 그의 영화에서 특별한 공통점을 꼽는 건 쉽지 않다. 이정국 감독은 “내가 술, 담배를 안 하니까 술 마시거나 담배피우는 장면이 별로 없는 정도일 것”이라며 웃는다. 이즈음에서 그를 영화의 길로 이끈 선택의 순간들이 궁금해진다.

<블루>는 지금껏 해보지 않은 장르에 도전한다는 의미도 있었나.

난 내가 아직 젊다고 생각한다. <블루>를 하면서 이걸 잘할 수 있다면 어떤 영화든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여겼다. 할리우드영화가 삶을 과장하고 관객에게 아부하고 그러지만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 관객을 즐겁게 하는 것, 잠시라도 현실에서 도피하게 만드는 것, 그것도 영화가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영화학도로서 모든 장르를 다 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다. 끊임없이 ‘자연과 인간’을 다루는 영화를 하겠지만 다음 영화는 미스터리스릴러를 생각하고 있고 언젠가 무술영화도 꼭 하고 싶다. 이소룡 때문에 영화의 매력에 빠졌던 만큼 꼭 그런 무술영화를 하고 싶다. 그래서 지금도 관련자료를 계속 모으는 중이다.

자연과 인간이라니.

고등학교 다닐 때 철학자를 꿈꾸기도 했다. 노장사상 같은 데 익숙한 편이고 대학에서 임업을 전공한 적도 있다. <두 여자 이야기>의 배경으로 자연을 보여준 대목이나 <편지>가 숲에서 끝나는 것도 그런 생각과 관련있다. 아까도 흐름에 맡겨둔다는 말을 했지만 내 삶의 방식이 그런 식이다. 자연스럽게 흐르는 대로 두면서 살아가는 주의다.

그런 생각은 데뷔작 <부활의 노래>부터 시작된 것인가? <부활의 노래>와는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데.

<부활의 노래>는 인간에 대한 매력에서 시작한 영화다. 광주 도청을 사수하다 죽은 사람들, 인간에 대한 매력 때문에 만든 거지 이념적인 것은 관심도 없었다. 사람에 대한 관심이나 자연과 인간의 관계, 둘 중 하나를 어떻게 드러내지 않고 보여줄 것인가, 고민한다. <편지>도 재미있는 신파로 보면 된다. 굳이 철학적 언어를 쓰거나 그럴 필요는 없다. 오즈, 미조구치, 구로사와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도 그런 거다. 그들의 영화를 보면 내러티브가 너무 쉽다. 쉬운 이야기인데 동양철학의 진수를 담고 있다.

그동안 영화를 보면 부침이 분명하다. 흥행성적으로든 작품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든 한 작품이 성공하면 다음 작품은 실패하는 식으로.

어느 정도는 그렇다. <부활의 노래>는 실패작이라고 생각한다. <두 여자 이야기>는 흥행은 안 됐지만 작품으로는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채널69>는 상업적 목적을 갖고 도전한 건데 흥행이 안 됐으니 실패작이다. <편지>는 상업적 목적에 제대로 부합했고. <산책>은 흥행은 안 됐지만 후회는 없다. 내 맘껏 해본 거고 더이상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회는 없을 거 같다. 사이클로 보면 <블루>는 성공하는 건데. (웃음)

어떤 계기로 감독을 하게 됐나.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데 이소룡 때문이다. 어릴 때 이소룡 흉내를 잘 냈고 이소룡 때문에 태권도 유단자가 됐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무술로 성공해 보겠다며 스승을 찾아 광주에서 나주까지 가기도 했다. 정말 무술영화의 주인공처럼 스승을 찾아 돌아다녔다. 어디에 쌍절곤을 잘 쓰는 사람이 있고 어디 가면 표창 던지기를 잘하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스승을 만나러 가기도 했다. 하지만 직접 해보니 운동으로 성공하기엔 너무 늦은 나이라 복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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