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 냄새, 오줌 냄새, 낙서 가득한 화장실에서 한 남자가 거울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 화장실 밖 창고에는 흑인들이 질러대는 고함과 랩 음악이 세상을 터뜨려버릴 듯하다. 저 세상을 향해 나서야 한다, 숨을 훅 들이마쉬고.은 1999년 데뷔 이래 한편에선 여성차별주의자, 동성애혐오주의자 등등 온갖 비난을, 다른 한편에선 열광적인 젊은이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백인 래퍼 에미넴이 주연을 맡은 반자전적인 내용의 영화다. 미국 개봉 당시 R등급 영화(대사는 거의 욕설과 속어로 이어진다)로선 <한니발>에 이어 최대의 흥행기록을 거뒀고 미국 언론들은 앞다퉈 그를 반항적 젊은이의 표상이라며 제임스 딘에 비교했다. 하지만 그 흥행의 비결은, 예쁘장한 백인 래퍼의 화려한 ‘성공 스토리’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밑바닥에서부터 뒤흔들어놓는 고전적인 ‘성장 영화’에 있다. 사람의 마음을 거칠게 휘저어놓는 랩 음악의 에너지와 함께.백인 래퍼 반자서적 소개커티스 핸슨 감독이 데려간 곳은 1995년 디트로이트의 흑인지역(실제 에미넴의 출생지도 디트로이트 부근이다)이다. 자동차산업의 영광은 옛 이야기가 된 듯, 이곳은 이제 꿈을 잃어버린 도시다. 빈 집마다 강간과 방화 같은 범죄들이 잇따르는 이 자동차 도시를 비추는 화면은 어둡고 녹슨 톤이다. ‘8마일’은 게토화된 흑인들의 거주지역과 백인 상류층의 주택가를 가로지르는 길, 사람들은 저 8마일을 뛰어넘어 뉴욕으로, 다른 곳으로 탈출하고자 할 뿐이다.R등급 두번째 흥행기록젊은 청년 지미 스미스, 일명 ‘래빗’(에미넴)에게 세상은 도무지 친절하지 않다. 오늘도 창고에서 벌인 ‘랩 배틀’(랩으로 벌이는 1:1 시합)에서 그는 마이크를 쥐고 단 한마디도 입을 벌리지 못했다. 흑인들은 그를 “엘비스”라 부르며 흑인의 음악에 끼어들지 말라고 욕을 한다. 쓰레기봉투에 옷가지를 처넣고 어쩔수 없이 돌아간 낡은 트레일러에, 엄마(킴 베이싱어)는 자신의 고교동창과 동거생활을 하고 있다. 쇠락한 제철공장에서 일을 하던 그에게 모델을 꿈꾸는 알렉스(브리트니 머피)라는 연인이 생기지만, 그 연인도 출세를 약속하는 흑인친구에게 빼앗긴다. 래빗이 웃음을 보이는 건 어린 여동생과 피부색과 관계없이 자신을 믿어주는 퓨처, 체다 등 4명의 친구들뿐이다.“다른 랩을 보여주겠어”촬영 6주 전 감독과의 리허설이 전부였다지만, 에미넴의 창백하고 고독한 얼굴은 이 막막한 인생의 래빗 그대로다. 삽입된 곡 <루즈 유어셀프>에서 에미넴이 “난 새로운 세계질서의 짱이야…다른 랩을 보여주겠어”라고 내뱉은 대로, 브리트니 스피어스 같은 인형같은 팝스타의 영화 데뷔(<크로스로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다른 영화’를 보여준 셈이다. 또 한명의 배우, 킴 베이싱어. ‘섹시스타’의 대명사였던 이 배우는 나이가 들수록 얼굴에 슬픔을 간직하는 듯하다.묵사발이 되었던 영화의 첫 장면 무대에 다시 서서, 래빗은 자신의 어두운 삶을 모두 랩으로 뱉어내며 우승을 거머쥔다. 그리고 화려한 파티나 레코드 데뷔가 아니라 자동차공장의 야근길로 터벅터벅 돌아갈 때, 영화는 자신을 무시하던 흑인이나 세상에 대한 ‘승리’가 아니라 자기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청춘의 초상화가 된다.우승하지만 다시 공장으로랩 음악의 팬들에겐, 지빗 등 영화에 직접 출연한 래퍼들의 모습이나 바닐라 아이스를 비롯한 백인 음악들을 무차별적으로 조롱하는 대사 또한 즐거움일 것이다. 식당차 앞에서 래빗이 게이 동료를 옹호하는 랩 장면도 에미넴에 대한 논란을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장면. 랩 음악이 생소한 사람이라면? 그래도 그 거칠고 폭발적인 에너지에 눈과 귀를 떼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21일 개봉.김영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