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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더드의 정치성,<이브의 아름다운‥> O.S.T
2003-02-05

성기완의 영화음악

최근에 비디오와 O.S.T가 출시된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는 레즈비언 커플의 사랑을 다룬 특이한 로맨틱코미디이다. 보통 ‘성 정체성’을 다룬 영화는 한쪽 방향으로 설정된 성 정체성을 끝까지 밀고 나가기가 쉽다. 그러나 이 영화는 매우 보수적인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제시카를 등장시켜 조금 덜 급진적인 상황을 제시한다. 제시카는 잠시 동안 레즈비언 커플이 되었다가 결과적으로는 전격적인 레즈비언이기를 잠정적으로 중단한 상태가 된다. 그 사이에 조쉬라는 남자가 동시에 갈등과 화해의 요소로 작용한다. 급진적인 시원함은 없지만 이성애자, 동성애자, 양성애자들이 자연스럽게 등장하여 결국은 현실 속에 다양한 성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별 무리없이 일상적인 관계맺음을 이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음악은 스탠더드 재즈, 클래식 기타 솔로, 힙합 등 매우 다양하게 채택되어 있다. 감정의 흐름이나 배경의 진행 속에서 음악은 기민하게 움직여 거기에 느낌을 맞춘다. 그러나 음악의 기조는 역시 여성 재즈 보컬리스트들이 부르는 스탠더드 재즈 넘버이다. O.S.T에는 사라 본, 아니타 오데이, 엘라 피츠제럴드, 다이나 워싱턴, 카맨 맥래, 블라섬 디어리, 페기 리, 빌리 홀리데이 등 미국 재즈사에서 가장 윗줄을 차지하고 있는 옛/현역 여자 가수들의 이름이 총망라되어 있다. O.S.T 음반은 늘 ‘모음앨범’의 역할을 하게 마련인데, 이 음반의 음악들은 특히 그렇다. 이렇게 쟁쟁한 재즈 여가수를 모으는 일은 우선적으로 상당한 예산을 잡혀 있지 않으면 성사되기 힘든 일이다. 요즘같이 불황에 허덕이는 음악산업계의 단일 프로젝트로는 조금 무리이다. 영화음악이니까 이런 게 가능한 것이다. O.S.T사업은 점점 대중음악의 중요한 분과가 되어간다.

심각하기보다는 달콤하고 그리 부담스럽지 않은 로맨틱코미디와 스탠더드 재즈넘버들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나 <어느 멋진날>에서처럼 잘 어울린다. 특히 미국 대도시에 사는 중산층 백인의 일상적 삶과 사랑을 다룬 영화일 때에는 더 그렇다. 재즈 아티스트들에게 스탠더드는 즉흥연주의 살이 붙는 뼈대다. 아주 유명한 스탠더드 넘버의 코드 정도는 일상적으로 외우고 있어야 상식적인 재즈 뮤지션으로 취급받는다. 듣는 사람에게 스탠더드 넘버란 한마디로 일상화된 멜로디를 뜻한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귀가 닳도록 들어도 질리지 않고 오히려 점점 사무치는 노래들이 된 것이 스탠더드이다. 노래에는 사주가 있다. 어떤 노래는 스탠더드가 되고 또 어떤 노래는 아무리 좋아도 그렇게 되지 못한다. 한 사람이 자신만의 운명 속에서 살고 죽듯 노래도 그렇게 살고 죽는데, 스탠더드는 그중에 사주가 좀 좋은 것들이다. 스탠더드는 노래라기보다는 그냥 치약이나 칫솔처럼 일상의 한 부분이다. 레즈비언 커플의 달콤하고 씁쓸한 사랑과 우정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미국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너무도 귀에 익숙한 멜로디들이 부담없이 흐른다. 그 부담없는 멜로디가 관객의 마음에 스며 어느새 동성애라는 게 그냥 보통 사람의 여러 성적 취향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걸 넌지시 지시한다. 스탠더드의 비정치성이 정치성을 발휘하도록 설정한 대목이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