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예로부터 한국사회의 설 연휴는 온갖 영화들이 자웅을 겨루는 시기로 온 세상에 정평이 나 있으니, 중원에 우뚝 서고자 하는 배우라면 이 연휴판에서 한 번 뜨는 게 평생 소원이라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내려왔다. 올해에도 예외는 아니었으니, 십수편의 영화들 가운데서도, 뭇 사람의 연인자리를 놓고 일합을 벌이는 5명의 배우, 5편의 영화가 눈에 쏙 들어오더라. <이중간첩>의 림병호, 한석규
만 3년만에 관객들 앞에 나타난 한석규는 꽃을 고르지도, 커피를 권하지도 않았다. “정윤희 한번 보러 내려왔수다.” 철저한 교육을 받은 뒤 목숨을 걸고 내려온 남한에서 귀순용사로, 안기부의 요원으로 자신의 신분을 속인 채 살아가는 림병호다. 몇년 만에 고정간첩 윤수미와 접선에 성공하지만, 결국 그는 북쪽으로부턴 배신자로, 남쪽으로부턴 간첩사건의 연루자로 운명지워진다. 남과 북의 권력으로부터 용도 폐기처분 당하는 림병호는 오로지 상황에 떠밀려 브라질로, 죽음으로 향할 뿐이다. 하지만 속내를 드러낼 듯 말 듯 건조한 그의 표정은, 그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게 했던 우리의 역사를 자꾸 떠올리게 한다. <영웅>의 고혹한 영웅 비설, 장만위 비설, 장만위가 걷기 시작하면 세상이 모두 숨을 죽이고 그에게 절을 하는 듯 하다. 장이모 감독의 ‘대담스런’ 중화주의에도, <영웅>을 외면할 수 없는 건 장만위가 있기 때문이다. 그의 연인 량차오웨이(파검역)는 ‘천하’라는 알 듯 모를 듯한 단어 한마디에서 ‘깨달음’을 얻고 진시황의 목전에서 칼을 거두고 말지만, 비설은 끝까지 무명(리롄제)의 진시황 암살계획을 돕겠다고 나선다. 적색의 옷을 휘날리며 비오듯 날아오는 화살을 막아낼 때, 순백색의 옷을 입고 연인 가슴에 꽂힌 칼을 자신의 가슴에 찌를 때, 그는 도도한 무사이자 아름다운 연인이다.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리어나도. 이름부터 그 많은 톰이나 존 따위들과 나란히 놓이기에는 너무 고귀해 보이는 이 태생적 왕자님은 오랫동안 일종의 거지왕자이기를 자처해왔다. 마약에 쩔거나 대책없는 반항아이거나. 수많은 영화에서 “어때 그래도 멋있지”를 외치는 듯한 그의 제멋대로 스타일은 2000년 <비치>에서 결국 왕자적 면모를 완전히 잃고야 말았다. 그리고 2년 뒤, 리어나도는 복구불가능해보이던 왕자적 기품을 빛내며 <캐치 미 이프 유 캔>으로 돌아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에서 그가 연기하는 프랭크 아비그네일 주니어는 희대의 사기꾼. 10대의 나이에 비행기 조종사, 의사, 변호사를 자유자재로 연기하며 수백만 달러의 돈을 주물렀던 인물이다. 디캐프리오는 천재적 두뇌에 숨길 수 없는 10대의 천진함과 수려한 외모를 곁들여 영화사상 가장 매혹적인 사기꾼을 연기한다. 몸에 착 감기는 파일럿 제복을 입고 미소짓는 디카프리오를 보면서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재간을 가졌다면 아마도 당신은 철심장! <클래식>의 조승우 친구의 약혼자를 사랑하는 남자, 친구가 약혼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대필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조심스레 옮기는 남자, 준하는 60년대 고등학생이다. 애끓는 사랑을 품고 있지만 그는 호기심 많고 수줍음 많으며 장난기 가득한 10대인 것이다. 준하가 그렇듯 조승우는 완벽한 꽃미남이 아니다. 그러나 포크댄스 교실에서 좋아하는 여학생 주희 옆에 앉으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나 약혼자와 키스(사실은 뽀뽀)했다는 친구의 고백을 들으며 아이처럼 실망하는 그의 표정은 카리스마 넘치는 꽃미남이 보여줄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한다. 작은 눈을 반달로 만들면서 삐뚤빼뚤한 앞니를 드러내며 씩 웃을때, 준하는 누구라도 여고시절의 한켠에 새겨두고 싶은 첫사랑의 아이콘으로 자리잡는다. <스몰 타임 크룩스>의 한심한 은행털이 레이, 우디 앨런 뉴욕의 투덜이 우디 앨런이 정말 볼품없는 은행털이 레이로 변신했다. 은행 옆집에 아내 프렌치를 시켜 쿠키가게를 차리고 그 지하에서 은행으로 통하는 땅굴을 판다는 것이 그만, 지도를 거꾸로 들고 작업하는 바람에 엉뚱한 가게로 침투한다. 경찰, 굴 입구에서 대기중. “은행 털려던 게 잘 안 됐어요…이딴 짓 안하고 과자나 팔게요.” 그러나 과자가게는 엄청 잘 돼 프렌치와 레이 부부는 떼부자가 되는데, 이번엔 돈으로 교양을 산다. 알고보니 앨런, 뉴욕 지식인 사회에 침입한 스파이인데, 교양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이기적인 속물인지 까발기기 시작한다. 궁시렁 궁시렁 궁시렁 궁시렁…. <한겨레> 영화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