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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색채 뒤덮은 탐미주의…그 화려한 실험 ‘영웅’
2003-01-24

뒷날 중국을 통일하여 최초의 황제가 될 영정의 궁궐, 까마득한 계단에서 내관이 무사 무명(리롄제)을 맞이하려고 종종걸음을 치며 내려온다. 세트의 규모부터 시야를 압도한다. 규모, 이것이 <영웅>의 기초다. 무명은 단신 영정의 앞에 자리잡는다. 그리고 한 개의 창과 두 개의 검을 바치게된 경위를 말한다. 7웅이 할거하던 춘추전국시대, 승승장구하는 진나라의 왕 영정의 목숨을 노리는 자객들이 출몰했는데 무명은 그 중 가장 위협적인 세 검객을 처치했다는 것이다. 영화는 바로 그 무용담에서 출발한다. 첫째 대목, 장천이란 고수를 어떻게 쓰러뜨렸나. 눈먼 악사의 탄주하는 현악기의 음악이 배경에 깔리며, 무명과 장천의 대결장면이 펼쳐진다. 이건, 서극의 와이어액션이나 <와호장룡>의 검술장면보다 더한 과장이다. 리롄제의 고공체류 시간은 현실적 감각을 아예 벗어나 버린다. 극도의 과장, 이것이 <영웅>의 화법이다. 파검(량챠오웨이)과 비설(장만위)이라는 두 고수가 영정의 무수한 호위군사를 뚫고 궁중 한가운데로 진입하는 것도, 파검과 무명이 호수 위에서 물을 가르며 벌이는 길고 긴 대결도 모두 가능하다. 그것이 <영웅>의, <영웅>이 되살려낸 중국식 과장이다.

장이모 감독은 <영웅>을 할리우드식 블록버스터와 맞붙을 중국 대표선수로 만들겠다고 호언했었다. 규모의 면에서 이 영화는 할리우드 부럽지 않다. 그런데 형식과 미감은 할리우드와, 아니 서양의 여느 영화들과 전혀 다르다. 과장의 수사학이 그 첫번째 차이라면, 두 번째 차이는 색조다. 장이모는 `무명은 세 고수를 어떻게 쓰러뜨렸나'라는 이야기를 화자를 달리해서 되풀이한다. 화자가 바뀌면서 영화의 주조색도 바뀐다. 무명이 말한다. 연인 사이인 비설과 파검을 이간질해 비설로 하여금 파검을 죽이게 했다. 하나 남은 비설을 처치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노라. 이 부분의 색조는 적색이다. 이야기를 듣던 영정이 되받는다. 내가 아는 파검과 비설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아마 두 사람은 너를 내게 접근시키려고 자신을 희생했을 것이다. 그 희생의 과정, 영정의 추측과 상상 대목은 푸른색이다. 주조색의 변화가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 색조의 도움 없이도 영화는 흘러갔을 것이다. 다만 이 장치는 색채에 관한 장이모의 집착을 증명하는데 유용했다. 영화는 중국 산수를 화려하고 장대하게 재현해내고 있다.

때때로, 그 탐미주의는 내용을 희생시킨다. 배우들은 화장으로 표정을 지운 채 인물의 특성만 살려낸 경극의 배우들처럼 역할의 동선만을 따라간다. 이건 영화가 아니라, 옛이야기 방식의 재현처럼 보인다. 장이모의 `중국적 대중영화'는 이렇듯 낯선 형식적 실험이 되어있었다.

<투란도트>보다 장대한 중국식 오페라라 불러도 좋을 <영웅>의 실험에는 결정적 허당이 있다. 왜 파검과 무명은 영정 앞에 이르러서야 칼을 꺾는 것일까. 대세를 쥔 자에게 천하를 주어서 전쟁을 끝내자는 이 `영웅'들의 투항론은 영화 속에서 돌연 튀어나온다. 궁궐의 위용을 보니 영정이 천하를 통일할 인물로 판단됐다는 것인지, 어쩐지 알 도리가 없다. 그들은 아무도 설득하지 못한 채 싸움을 접는데, 영화 <영웅>이 공허하지 않을 수 있을까. 화려한 실험 <영웅>이 노골적인 중화주의의 나발소리처럼 들리는 까닭이다. 24일 개봉.

안정숙 기자 namu@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