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 웃긴다. 작달막한 키에 매부리코가 귀여운 잔머리의 대가, ‘미스터 빈’ 말이다. 명절 때면 TV에서, 어디 외국에라도 가볼라치면 기내에서 거의 어김없이 만나볼 수 있는 남자이기도 하다. ‘미스터 빈’을 연기한 로완 앳킨슨(48)이 옥스퍼드대학을 나온 수재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 그런 머리 좋은 수재가 온몸을 던지며 말없이 바보 흉내를 내는 모습에서 대중은 더욱 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미스터 빈’은 로완 앳킨슨이 9살 때 고안한 아이디어로 ‘빈’이라는 이름은 지난 1989년 수십개의 야채 리스트를 가져다놓고 고른 결과라고 한다.
로완 앳킨슨의 슬랩스틱코미디를 말하면서 찰리 채플린을 빼놓을 수 없다. 나는 여기에 베니 힐도 추가하고 싶다. 채플린을 웃겼다고 하는 베니 힐은 1955년부터 89년까지 방영된 섹스코미디 ‘베니 힐 쇼’로 세계 109개 나라 성인들의 배꼽을 잡게 했던 인물이다. 채플린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가진 자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지녔다면 뚱뚱하고 넉살 좋은 베니 힐은 섹스를 내세워 사회의 잘못된 현상을 꼬집는다. 이에 비해 로완 앳킨슨은 전형적인 소시민의 모습이다. 꼬질꼬질하긴 하지만 그래도 항상 양복에 넥타이 차림이다. 그러면서 격식이라는 이름의 노예가 돼버린 우리의 위선을 가차없이 벗겨버린다. 식당에서 콧구멍을 마구 후비고 주차금지 구역에 슬그머니 차를 대고 달아나는 식이다. 늘 갖고 다니는 곰인형은 ‘퇴행 심리’를 보여주는 도구다.
공교롭게도 위에 지적한 세 사람이 모두 영국인(또는 영국 태생)이다. 그러고보면 말이 별로 없고 형식을 중시하는 영국사회에서 슬랩스틱코미디의 대가들이 계속 출현하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런데 이 남자, 또 웃긴다. 이번엔 애니메이션이다. 곱슬머리에 반쯤 감은 눈, 왼쪽 볼에 도톰한 점까지 로완 앳킨슨을 판박이처럼 떠놓은 캐릭터가 등장하는 11분짜리 52부작이다. 굵직한 검은 선으로 등장인물을 그리고 배경은 밝은 파스텔톤으로 밝은 분위기를 살려내고 있다.
사실 <미스터 빈>이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다고 했을 때 어떻게 만들 것인지 궁금했다. TV시리즈나 영화 <미스터 빈> 내용 자체가 지나치게 만화적이어서 도대체 애니메이션으로 더 보여줄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로얄 빈’이라는 에피소드에서 미스터 빈은 깨진 찻잔을 새로 구입하기 위해 버킹엄 궁전에까지 들어간다. 우여곡절 끝에 여왕을 만나고 찻잔까지 선물로 받는다. 그렇지, 여왕과 궁전을 거리낌없이 등장시키기엔 애니메이션이 딱이다.
‘영 빈’이라는 에피소드를 보자. 여기에는 집주인 위켓 여사와 애꾸눈 고양이 스크래퍼 등 애니메이션 속 등장인물들과 빈이 어떤 관계로 맺어졌는지가 잘 드러나 있다. 다락방에 올라갔다가 어린 시절 장난감 박스를 발견하고 회상에 젖는 빈. 귀엽게 재현된 10대의 빈이 등장해 어린 시절 ‘활약상’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애니메이션 <미스터 빈>은 실사보다 훨씬 순화돼 있다. 애니메이션의 특성을 활용해 기기묘묘한 활약을 보일 것으로 기대했던 사람들은 “뭐 이래” 할 수도 있다. 캐릭터 상품을 팔기 위한 전략이라는 비난도 나올 법하다. 그럼에도 담백한 코미디를 보는 맛은 살아 있다. 무엇보다 그림 자체의 높은 완성도가 이를 보증한다. 앳킨슨은 애니메이터들 앞에서 실제 연기를 했다. ‘키퍼’라는 강아지가 나오는 애니메이션으로 각종 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휩쓴 러시아 출신의 감독 알렉세이 알렉세프는 이를 능숙한 손길로 다듬어냈다.
백문이 불여일견. 궁금하신 분들은 매주 주말(토·일) 오후 2시30분 위성방송 디즈니 채널 앞에 앉아보시라. 정형모/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hyu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