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은 | 아줌마 femolution@dexmedia.co.kr
영화잡지는 아무나 만드나. <친구>가 꾸준히 얘깃거리를 만들어주고는 있지만, 이렇게 볼 만한 영화 입에 올릴 만한 영화가 없는 시기에도 영화잡지가 꾸준히 나오는 걸 보면, 역시 전문가는 따로 있다. 10개관짜리 복합상영관에서 보고 싶은 영화가 하나도 없어서 한 시간씩 망설이던 아줌마는 결국 ‘지우개 찬스’ 전략을 택했다. 두편을 보면, 한편 보는 것보다는 실패할 위험이 줄어들지 않겠냐는 간단한 산수였다. 에구, 산수 안 했으면 칠천원만 날리는 건데. 영화가 섹스 파트너라면, <미스 에이전트>나 <기프트> 둘 다 만족스러운 물건은 못 된다는 것이, 지지난 토요일 밤과 일요일 새벽에 두 영화를 잇따라 본 아줌마의 소감이다. <미스 에이전트>는 눈요깃감이지 같이 누울 만한 상대는 못 되고 <기프트>는 그도저도 아니었다.
샌드라 불럭이 미스 뉴저지의 대타로 출전하는 영화 <미스 에이전트>는 <친구> 표를 구하지 못한 관객을 위한 위안부 노릇은 그럭저럭 해내는 것 같았지만, 토요일 오후를 몽땅 배팅할 만한 가치는 없었다. 하긴 미스 유에스에이 후보들에게서 그 이상을 바랐다면, 그대는 미인대회가 세계평화에 기여한다고 믿는 사람임이 틀림없다.
웃자고 만들었고 실제로 몇번 웃을 수 있는 이 영화가 짜증났던 것은, 제법 훈수까지 두려고 든다는 것이다. 미인들이 겉만 미끌찬란하고 골은 텅 빈 존재들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더라는 설정은 시대착오적이지 않은가. 요즘이 하나 가지면 다 가질 수 있는 시대라는 건 아는 사람 다 아는 사실이다. 있는 집 딸이 얼굴 예쁘고, 몸매 죽여주고, 공부 잘하고, 마음도 착한 시대. 있는 집 아들이 키도 크고, 이두박근 우람하고, MBA 같은 ‘쯩’ 줄줄이 따내고, 매너도 좋은 시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마음부터 몸까지 다 돈이 티를 내는 시대. 대통령의 아들이 대통령이 되고 대통령의 부인이 상원의원이 되고 재벌의 아들이 재벌이 되고, 되고, 되고 되고도 남는 시대. 그러니 그냥 자본주의판 박씨부인전처럼, 미운 오리가 돈을 들였더니 백조가 되더라고만 얘기했더라면, 그쪽이 오히려 진실에 가까웠을 거 아닌가. 누가 미인 싫대? 돈 없으면 미인도 못 되는 이 시대가 싫다고 했지.돈을 들인 만큼, 당연하게도 샌드라 블럭은 영화 뒤에 가서 예뻐진다. 하지만 샌드라 블럭 미인 만드는 영화에 들인 돈의 반의 반의 반만 들인다면, 견적 안 나오는 아줌마조차도 ‘블록버스터’로 거듭나서 경찰 간부 한명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후릴 수 있을 거다. 상대가 아무리 줄리아 로버츠의 신랑감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에구, 잘난 척 해봤자다. 아줌마 또한 이름 앞에선 깜박 죽지 않는가. 벤자민 브랫이라는 남자배우가 줄리아 모모와 모모한 사이라는 얘기를 듣고 자기 타입도 아닌 그를 유심히 관찰하고 이름을 외우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감독도 그래서 그를 캐스팅했던 걸까? 그런 후광효과를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러니 누구의 딸, 누구의 아들, 누구의 누구가 되지 못한 것을 후회할지어다.
두 번째 ‘섹스 파트너’ 얘기로 넘어가자. 케이트 블란쳇의 ‘점쟁이가 사는 마을’, 일명 <기프트>를 보고 난 뒤 아줌마는, 상대의 요구에 따라 체위를 수십번 바꿔주었건만 끝내 오르가슴에 이르지 못한 여자처럼 지치고 불만족스러웠다. 범죄물로는 서툰 거짓말이고, 엽기물로는 자극의 강도가 모자라고, 초자연물로는 맛보기도 안 되는 이상한 영화를 보고나면 누구나 그렇게 된다. 게다가 중반부터는 굳이 카드 점을 안 쳐도 다음 장면을 훤히 내다볼 만큼 아줌마의 예지력 또한 영험해져 갔으니, 저 따위 물건으로는 체위야 어찌됐건 오르가슴을 맛보기 어렵겠다는 사실 또한 애초에 점쳐졌던 것이다. 이런 영화를 보고 두쪽씩이나 ‘썰’을 풀어야 했던 김봉석 기자의 불만을 이해할 만했다.
말을 두번이나 갈아타고도 욕구불만인 채로 집에 기어들어간 아줌마는, 이번에야말로 일요일 새벽에 행해 마땅한 정상적인 행위, 즉 정상체위로 누워 혼자서 잠자는 행위에 돌입했다. 쿨쿨. (아줌마가 참다운 오르가슴을 맛본 것은 영화를 본 지 이틀이 지난 지난 화요일이 되어서였다. 샌드라 불럭이나 케이트 블란쳇이 몸 속에 잠복해 있다가 뒤늦게 아줌마의 숨어 있던 동성애적 기질을 일깨워주었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날 아줌마는 난생 처음 외국행 비행기를 탔고, 비행기가 뜨는 그 순간 재미없는 영화나 <씨네21> 원고 마감 따위는 다 잊어버릴 수 있었다. 진정한 쾌감은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