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엘 하네케 <피아니스트>
‘그녀’는 미쳤다. 마흔 나이에 찾아온 젊은 애인에게 새도마조히즘으로 가득찬 편지를 보냈다. 그가 그 편지를 읽는 순간 그의 성기는 오그라들었다. 그녀를 향한 팬터지가 와장창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녀는 자신의 오만함을 모두 버리고 그에게 무릎을 꿇었다. 지긋지긋한 사랑의 복수극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노리는 것은 그런 복수극이 아니라 바로 ‘우리’에 대한 자문자답이다. <피아니스트>의 감독 미카엘 하네케는 교양과 상식으로 포장된 우리의 내면에 대해 질문하면서 그 내면을 갈갈이 찢어버린다. 감독이 보기에 인간이란 불결한 위선으로 가득차 있는 쓰레기다. 하지만 그의 얘기를 따르다 보면 그 쓰레기는 동정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계란 네 개를 빌미로 한 가족을 끝장내는 지긋지긋한 영화 <퍼니 게임>을 본 사람이라면 그 영화의 주인공인 짧은 머리 남자가 관객을 향해 보내는 야릇한 눈길을 기억할 것이다. 이 <퍼니 게임>의 감독 미하엘 하네케가 만든 <피아니스트>는 그보다는 훨씬 점잖아졌지만 지독한 점은 여전하다. 그 야릇한 눈길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여주인공의 무표정한 얼굴은 더 무섭다. 또 그가 그린 인물만 지독한 것이 아니라 영화적으로도 그렇다. 냉철한 피아니스트 교수인 에리카(이자벨 위페르)의 멜로 드라마로 끝날 수도 있었지만 감독은 철저할 정도로 멜로 드라마의 공식과 관습 그리고 아이콘을 배반한다. 마흔살 미혼의 여주인공의 머리칼은 빛나지도 않고 화장기 없는 피부는 결코 매혹적이지 않다. 그녀는 차가운 교사지만 밤에는 혼자 섹스숍을 드나들면서 포르노 잡지를 사모으는가 하면 자동차 극장의 차 속에서 벌이는 다른 남녀의 섹스를 훔쳐보기도 한다. 멜로 드라마 여주인공의 환상은 모조리 부서진다. 에리카에게 반한 젊은 청년 월터(브누아 마지멜)와 처음으로 정을 나누는 장면 역시 그렇기는 마찬가지다. 그것은 하다가 그만 두는 화장실의 오럴 섹스였다. 그 곳 역시 어떤 황홀한 빛이나 그윽한 어둠도 없는 곳이었다. 애걸복걸하는 월터에게 에리카가 해 준 것이라곤 자신을 쇠사슬로 묶고 때려달라는 장문의 편지 읽기였다. 그전엔 그녀는 자신의 도저한 성욕이 지긋지긋해서(혹은 또다른 맥락에서) 면도칼로 자신의 성기를 그은 적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욕망을 누군가가 알아주기를 원한다. 하지만 당신들도 알다시피, 우리의 불타는 욕망이 한번이라도 채워진 적이 있던가 그 욕망을 향한 질주는 너무 가련해서 할 말을 잃게 만든다. 그래서, 미친 그녀는 바로 우리다. 이 도저한 기만과 위악 그리고 자기 연민은 ‘너무’ 하다.
이효인 영화평론가·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