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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슬하에서 키운다,<희망을 그리는 세계3>
2003-01-09

anivision

요즘 11개월 된 둘째 딸을 키우며 새삼 슬하(膝下)라는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됐다. 흔히 ‘부모님 슬하에서 자라나…’라는 말은 많이 하지만 정작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알게 됐다는 얘기다(큰애 때는 얼떨결에 키워서 잘 몰랐다).

아기들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사고를 친다. 갑자기 조용해질 때 특히 조심해야 하는데, 그럴 때면 백이면 백 화장실 변기물을 휘젓고 있거나 화장대에 기어올라가 난리블루스를 치고 있는 것이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잘 놀다가도 벌러덩 뒤로 넘어지는 경우다. 그러면 또 아파 죽는다고 울어젖힌다. 그런 모습을 보면 부모로서 잘 돌보지 못한 죄책감과 ‘왜 제 몸 하나 제대로 못 가누나’ 하는 분노가 마구 뒤섞여 가슴이 꽉 메어져온다. 가장 좋은 방법은 다리를 O자형으로 모으고 그 안에서 놀게 해야 한다. 바로 무릎 아래, 즉 ‘슬하’에서 키우는 것이다.

어디 아기였을 때뿐이랴. 아이가 한살 두살 먹어갈수록 점점 아이를 키우는 일이 조심스러워진다. 험하고 이악스러운 세상에서 아이를 보호해야 한다는 부담감이다. 특히 쏟아지는 영상물 홍수 속에서 그런 부담은 강박관념처럼 다가온다. 사실 부모가 아이에게 안심하고 보라고 권해줄 작품이 몇이나 될까. 몇년 전 오시이 마모루 감독과의 인터뷰에서 “영상물의 95%가 쓰레기”라고 했던 그의 말에 공감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런 만큼 어떻게 하면 좋은 영상물을 보여줄까, 영상물에 중독되지 않고 그 순기능을 활용할 줄 아는 능력을 키워줄 수는 없을까 하는 고민은 자식을 키우는 부모라면 누구나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고민에 도움이 되는 것이 이른바 미디어교육용 애니메이션들이다. 라바메이저(www.rabamajor.com)라는 곳은 이런 일의 대중화에 가장 앞장서고 있는 업체 중 하나다. 이곳에서 시리즈로 출시하고 있는 ‘희망으로 그리는 세계’(Right from the Heart) 역시 대표적인 미디어교육용 교재다. 유니세프(유엔아동기금)의 어린이, 청소년 권리조약을 주제로 캐나다국립영화원(NFBC)에 소속된 작가들이 만든 단편애니메이션을 모아놓았다.

그 <희망을 그리는 세계3>이 최근 출시됐다. 앞서 나온 1, 2편이 유치원과 초등학교 어린이용이었다면 이 작품은 1318세대용이다. 마약, 노동착취, 인신매매, 계층간의 갈등 같은, 묵직해 보이는 주제를 그린 일곱개의 작품이 들어 있다. 그중 <환각의 늪>은 마약중독의 심각성과 그 폐해를 인형애니메이션 형식으로 그린 작품이다. 브레티슬라프 포요르와 이반 비트 감독은 청소년들이 어떻게 마약에 손을 대게 되고 또 어떻게 중독되는지 찬찬히 보여준다. 홀로 휴가를 보내게 된 소년이 우연히 거리에서 마약 중독자를 만나 환상을 경험한다. 소년이 집안의 값나가는 물건을 빼돌려 마약에 탐닉하게 되는 것은 불문가지. 범죄의 수렁에 빠지기 직전 가까스로 탈출해 다시 친구들과 정상적으로 어울리는 모습을 보며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된다. 부록인 작품 해설서를 보면 청소년들이 토론을 통해 마약의 해악을 깨달을 수 있도록 NFBC 미디어교육 전문가들이 만든 몇 가지 방법이 담겨 있어 도움이 된다.

사실 부모보다 커버린 아이들을 언제까지 ‘O자 다리’에 넣어 키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냥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이런 작품들이 필요하다. 학교에서도 정례적으로 상영되고 TV에서도 자주 볼 수 있게 됐으면 좋겠다. 부모와 아이가, 선생과 학생이 서로 토론을 벌이고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는 주어야 한다고 본다. 사회에도 ‘슬하’(膝下)는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정형모/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hyu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