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를 좋아해요.” “나는 그 남자 아니면 죽어버릴 거야.” “오늘밤에는 기필코 호텔에 가고 만다니까.” 술자리에는 언제나 그런 말이 넘쳐난다. 더구나 인간 발정기의 정점인 20대 초반의 대학생들의 모임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이 만화 <이사>(세주문화)도 그 부질없는 술자리로부터 시작된다. 연애 감정은 술자리 최대의 화두이지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또 곤란하다. 그랬다간 우리의 젊은 전체가 거대한 비극의 덩어리가 되고 만다. 적당히 들어주는 척 무시하거나, 당사자를 은근슬쩍 부추겨서 술값이나 내게 하는 게 낫다. 내일이면 지구의 종말이 오는 듯 그 사람을 애절하게 찾다가도, 호르몬이 식어버리면 뒤통수를 긁으며 그냥 청춘의 달력 한장이 뜯겨져 나갔구나 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저 그런 술자리, 대충 눈에 들어오는 연애 함수. 조금은 시시하게도 보이는 러브코미디의 시작이지만, 이 만화를 누가 그렸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쉽게 마음을 놓지 못할 것이다. 바로 히로아키 사무라, 영원히 죽지 않은 몸을 가진 주인공으로 하여금 수백, 수천의 목을 베고 또 베게 만든 <무한의 주인>의 만화가다. 세심히 덧 그려간 연필 선에 가슴을 떨리게 하는 죽음의 장면들이 겹쳐지면서, 이 만화가가 또 어떻게 시시덕거리는 연애를 끔찍한 죽음으로 이끌어 갈까를 상상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두려움은 떨쳐두어도 좋다. 이 작품은 진짜 러브이면서, 진짜 코미디다. 게다가 히로아키에게서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썰렁하기 그지없는 개그가 만발하여 우리를 끊임없이 당혹하게 만든다. 죽음에서 좀더 나아간 만화가, 유머에서도 좀더 나아가기로 한 것이다.
A와 B, B와 C‥, 복합차원 연애함수
일부일처의 문화 속에서 공식적인 연애관계는 일대 일로 정리되는 듯하지만, 마음속의 연애관계는 딱히 그렇지도 않다. 몇개의 단편 에피소드 연작인 <이사>에서도 연애 함수는 꽤나 복잡하게 얽힌다. 일단 그들의 관계를 정리해 보도록 하자. 남자 A는 여선배 B를 좋아한다. B는 남자선배 C와 연인이다. C는 청춘협력대로 아프리카에 갔다가 다른 여자를 만나 임신을 시키고 돌아와 B와 결별했다. 여자 D는 남자 A와는 오랜 소꿉친구로 만나면 티격태격이지만 은근히 A를 좋아한다. A의 친구인 E는 D를 좋아하고, D는 E가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A에 대한 반발심으로 E와 사귄다. 여기에 기이한 과거를 가진 이탈리아인 F가 등장하고, F가 한번 자고 버린 여자 G가 복수심에 불탄 채 이야기에 끼어든다.
물론 핵심은 있다. 남자 A는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 B와 ‘자기를’ 좋아하는 여자 D 중에 누구를 택할 것이며, 그 사랑은 이루어질 것인가 나머지 연애관계는 곁가지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작품이 진짜 코미디로 멋들어지게 펼쳐지는 이유는 그 정신없는 연애관계를 중심으로 연이은 사건들이 청룡열차처럼 몰아치는 데 있다. 바로 거기에 특유의 냉소적이며 썰렁한 유머가 사정없이 내리치며 독자들에게 정신을 차릴 여유를 주질 않는다.
연애에 목마른 청춘은 언제나 사고투성이. 그때는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에 별의별 사건이 다 생기고, 온갓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르고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당사자들은 정말 목숨을 걸 만한 일생일대의 문제이지만, 조금만 거리를 두고 보면 그 우스꽝스러움에 배꼽을 잡지 않을 수 없다. A는 시종 진지한 연애 감정으로 도전하지만, 그들 주변의 사람들은 코웃음으로 일관한다. 사실 첫 데이트 장소로 동물원을 택하고, 선물로 중화 냄비를 사는 그 난센스는 객관적으로도 좀 심하다 싶다. 그리고 보통 그런 구애를 받는 당사자는 미안함 때문에 그에게 친절을 베풀거나 심하다 싶을 정도로 매몰차게 거절하는 편이 보통인데, B는 A를 은근슬쩍 놀려먹는 데 큰 재미를 느낀다. A의 공개적인 데이트 신청에 그날 밥값을 바가지 씌우는 조건으로 승낙하고, 괜히 마음에도 없으면서 ‘오늘밤에는 혼자 있기 싫다’는 둥 A를 꼬드겨 이상한 요정에서 술 대결에 나서게 한다. 종반부에는 A를 두고 고향으로 ‘이사’를 가면서 “네가 무슨 말을 하면 다시 생각할지도 모르는데”라며 A만 빼고는 모두가 다 아는 거짓말로 꼬리를 치는 척한다. 물론 A가 땀을 흘리며 고민한 끝에 “좋아해요”라고 하자, “그 말은 수도 없이 들었다”며 중화냄비를 흔들며 떠나버린다. 그래도 그녀가 ‘나쁜 여자’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냥 그의 연애 감정을 조금은 덜 무안하게 감싸주려고 했던 것뿐이다.
연애는 무모하게, 조크는 파렴치하게
<이사>를 지배하는 감정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연애는 무모하게, 대응은 뻔뻔하게, 조크는 파렴치하게, 여운은 따뜻하게…. 기오 시모쿠의 <5년생>이나 도메 게이의 <예스터데이를 노래하며>와 같은 비순정 세계의 연애담 정서를 공유하면서도 결코 지나치게 아픈 고민으로 이끌어가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이마 이치코의 여러 작품들과 비슷한 면모를 가지고 있지만, 그림의 선 때문에라도 전혀 다른 작품으로 보인다. 그리고 히로아키의 ‘코미디’ 감각은 무언가 확실히 다르다. 연애 묘사에서 소녀 만화체의 느닷없는 등장, 질투하는 여자의 마음을 난데없는 튀김요리 장면을 겹쳐 표현하는 이중적 묘사. <시어머니 죽이기>와 <허리케인 조> 등의 느닷없는 패러디…. 이상하게 어색한 표현들이 더욱 색다른 맛을 준다. 이명석/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 중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