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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한국영화, ‘통속성’으로 가득찬 영화
2002-12-31

<품행 제로>(감독 조근식)는 어느 고등학교의 ‘캡짱’인 중필(류승범)에 관한 보고서다. 그는 한 해 꿇었으며 그의 홀어머니는 미장원을 운영하고 있다. 그에 관한 소문은 거의 신화에 가깝지만 그런 그에게 미래는 없다.

하지만 꿈도 미래도 없이 일용할 재미와 용돈만을 위해 살아가는 그 앞에 어느 날 이웃 여고의 ‘퀸카’인 민희(임은경)이 나타난다. 그 여고의 ‘짱’인 오공주파 소속 나영(공효진)이 중필을 좋아하는데도 둘은 사랑에 빠진다. 이 삼각관계가 플롯을 지탱하는 축이라면, 재미는 산더미 같은 에피소드로부터 나온다. 또 그 에피소드들의 대부분은 1980년대라는 시대 상황으로부터 나온다. 하지만 그 시대 상황이란 것은 누추하기 짝이 없고, 그 시절 고단하게 살았던 사람들이 보기에는 창피할 정도로 굴욕적인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노스탤지어라든가 비판 정신 따위는 없다. 그냥 웃고 즐기기에 족한 것이다. 2002년 한국영화계를 압축하는 단어인 통속성, 그것으로 가득찬 영화일 뿐이다.

1930년대 프랑스 영화 사조 중에 시적 리얼리즘이란 것이 있다. 독특하게 모사된 리얼리즘이라는 특징과 인물과 이야기의 숙명론적 태도를 그 특징으로 꼽는다. 이를 대표하는 감독 중의 한 명인 장 비고의 작품 중에도 <품행제로>(1933)라는 같은 제목의 영화가 있다. 영국 프리 시네마의 감독 린제이 앤더슨이 만든 도발적인 영화 <만약에...>(1968)는 이 <품행제로>에 경의를 표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학교 지붕 위에서 교사들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하는 장면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한국산 <품행제로>는 학교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 외에는 이런 류의 영화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1980년대라는 시대 상황이 필요에 의해 모사된 것과 마찬가지로 장 비고의 <품행제로>나 린제이 앤더슨의 <만약에...>도 조각나서 모사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 <품행제로>을 모사품 혹은 조악한 통속물로만 말할 수는 없다. 21세기의 영화는 모사와 통속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며, 관객들 역시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웃음의 해학성, 성의 관능성, 폭력의 선정성, 몽상의 환상성 그리고 눈물의 감상성. 이 다섯 개의 코드가 통속성을 채우는 내용물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품행제로>는 웃음과 폭력 그리고 몽상으로 이루어진 통속적인 작품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영화를 쉽사리 비루하다고 타박할 수는 없다. 거의 대부분의 공인된 예술 작품 속에도 통속적인 요소들은 거의 빠짐없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제 과제는 주어졌다. 이 경박한 통속성의 시대에 그것을 재해석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2003년 한국영화들 역시 통속성으로 가득찬 작품들만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이 거대한 물결 앞에서 비평은 속수무책이다.

이효인 영화평론가·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