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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노 뮤지션 가재발의
2002-12-26

얼굴없는 펄스값의 흐름

테크노 뮤지션 가재발의 두 번째 앨범 <Another One>이 발매되었다. 데뷔 앨범 <온다>를 발매한 지 2년 만이다. 가재발이라면 생소하게 생각하는 독자들이 많겠지만 그는 이미 테크노 음악계에서는 자신의 스타일을 구축한 인물이다. 그는 박지윤, 샤프, 이수영, 이윤정, 이정현, 비 등의 음악에 자신의 하우스 비트를 실어준 적이 있다. 그러니 이들 대중적인 가수들의 음악을 접한 사람이라면 가재발의 이름은 모르더라도 그의 ‘비트’는 이미 접해본 것이다.

가재발의 두 번째 앨범을 들으면서 먼저 오는 것은, 어떤 얼굴없는 펄스값이 흐르고 있다는 점. 비트가 갖는 익명성의 원리를 그의 음악이 일깨운다. 그의 음악은 다른 기기들보다도 특히 ‘컴퓨터’라는 장비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준다. 물론 샘플러나 드럼 머신, 그리고 시퀀서 같은 여러 장비를 사용하겠지만 그 기기들이 지닌 각각의 ‘개성’을 강조하는 뮤지션이 있는가 하면 가재발은 그 기기들의 특성을 컴퓨터 안으로 집적시켜 각자의 얼굴들을 지운다. 그런 다음 그것을 어떤 의미로는 자기 원리에 따라 재처리하여 사운드의 다발로 엮어내는데, 일종의 ‘표준화’ 내지는 익명화 과정이라고 불러도 좋을 그 재처리 과정에서 가재발 특유의 느낌이 역설적으로 탄생한다. 그 재처리 과정을 재현하는 것이 바로 그의 두 번째 앨범이라 할 수 있다.

타이틀곡 <어나더 원>을 비롯해 모두 14곡이 담겨 있는 두 번째 앨범은 일정한 바이트 수의 주파수로 이루어진, 박자의 흐름 속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하나의 리듬요소가 탄생하여 운동하고 또 서로 관계맺음으로써 리듬의 다발이 돼나가는 과정을 좀더 순수한 차원에서 추적해 들어가고 있는 앨범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감상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테크노 뮤지션은 몇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사운드의 흐름을 강조하는 타입이 있다. 주로 앰비언트 계통의 뮤지션들이 이런 성향을 지니고 있다. 둘째는 샘플된 데이터의 생생함을 강조하는 타입을 들 수 있다. 그들은 정육점 주인이 소의 늑골 밑에서 빨간 갈빗살을 도려내듯, 옛날의 소리들에서 한 부위를 잘라내어 그 생생함을 반복시키는 일을 즐긴다. 주로 빅비트 뮤지션들이 그렇다. 그 다음으로는 펄스값의 흐름을 강조하는 타입을 들 수 있다. 그들은 일정하게 튀는 원자들의 정해진 운동성을 미시적으로 감상하는 사람들이다. 주로 트랜스나 하드 하우스 계통의 뮤지션들이 이런 특징을 갖는데, 가재발은 세 번째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테크노 뮤지션은 무대 위에서 자기 자신을 뽐내기보다 비트 속에 자기 자신을 숨긴다. 비트는 박동처럼 끊임없이 튀고 그 ‘튐’의 스위치를 ‘ON’의 위치에 놓는 사람은 DJ이다. 그러나 DJ는 정작 드러나지 않는다. 물론 요즘에는 DJ도 무대에서 자신의 DJing을 뽐내기도 하지만 그것조차 그렇게 외향적인 일은 아니다. 정작 DJ는 LP의 회전 속에 자신을 던지는 일을 할 뿐이다. 수억의 동일한 마디처럼 끊임없이 반복되는 비트는 아주 미니멀한 차원에서 존재하는, 얼굴도 지문도 없는 최소한의 원소들을 연상시킨다. 그런 원초적인 상태로 존재한다는 건 무엇일까. 이름과 개성을 지니고 사는 것과 그러한 원초적 존재감 사이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런 질문들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 테크노 음악을 듣는 한 매력인데, 거기서 가장 중요하게 작동하는 것이 바로 ‘익명성’의 원리일 것이다.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