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ory
학생들에게 돈 뜯고, 싸움질하고, 수업 빼먹기 일쑤인 문덕고의 ‘쌈장’ 박중필(류승범)은 미용실을 운영하는 어머니를 돕다가 정란여고의 우등생 최민희(임은경)를 만난다. 보는 순간 중필과 민희의 눈길은 서로에게 향하고, 뭔가 ‘필’이 통한다. 중필은 전학생 영만이 민희와 함께 기타 교습소에 다닌다는 것을 알아내고는 덜컥 등록을 한다. 함께 기타를 배우며 중필은 자연스럽게 민희와 가까워진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에는 장벽이 많다. 오래 전부터 중필을 짝사랑하고 있었던 정란여고 오공주파의 나영(공효진)은 민희가 중필과 사귄다는 것을 알게 되자 민희를 협박한다. 한편 문덕고에는 싸움꾼 상만이 전학을 오고, 중필의 ‘'짱’ 자리가 위협당한다.
■ Review
올해 성공을 거둔 청춘영화 <해적, 디스코왕이 되다>와 <몽정기>는 모두 배경이 80년대다. 촌스럽고, 유치해 보이는 80년대를 배경으로 ‘X만한’ 청춘들이 펼치는 사랑 이야기. <몽정기>의 볼거리는 ‘섹스’였지만, 이야기의 중심은 사랑이었다. <품행제로>는 모범생과 불량학생의 사랑이라는, 익숙하면서도 늘 시선이 가는 설정으로 시작하여 80년대 대중문화의 풍경을 파노라마 스타일로 깔끔하게 펼쳐 보인다.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청춘영화 중에서 <품행제로>는 이야기의 튼튼함과 세련된 연출이라는 점에서 단연 돋보인다.
<품행제로>는 단정하게, 정석대로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어찌하여 모범생 민희는 천방지축, 품행제로의 중필을 사랑하게 되었을까 난해해 보이는 질문에 <품행제로>는 간단하게 답한다. 원래 깡이 있으니까. 도수 높은 안경에 비리비리해 보이는 민희는 모두 슬슬 피하는 나영을 마주보고도 겁내지 않고, 롤러장에서 시비를 거는 오공주파에 당당하게 항의도 한다. 어느 한순간 길을 잘못 들었다면, 민희도 나영처럼 ‘보스’를 하고 있을지 모른다. 중필 역시 어쩌다보니 싸움 잘하는 자신을 발견했고 그러다보니 불량학생의 길을 걷고 있는 것뿐이다. 당돌한 민희와 순진한 중필의 만남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고, 눈여겨볼 만한 구석이 많다.
<품행제로>의 플롯은 아주 단순하다. 남녀가 만나 사랑에 빠지고, 약간의 훼방꾼들이 있고, 결국 중필과 민희는 각자의 길을 간다. 한 가지 문제는, 사랑은 너무 쉽게 이루어지고 또 깨어지며 훼방꾼의 역할은 너무 작다는 것이다. <품행제로>를 이끌어가는 것은 플롯의 힘이 아니라 아기자기한 상황들이 빚어내는 즐거움이고 캐릭터의 힘이다. <품행제로>는 한 남학생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중필의 활약상을 알려주는 일종의 ‘뻥’이다. 다른 학교의 태권도부를 혼자 힘으로 때려눕혔다는, 이소룡의 <정무문>을 연상케 하는 위대한 무용담. 그 무용담은 태권도 부원들이 하늘로 붕붕 나가떨어지는 특수효과와 80년대를 풍미했던 <로보트 태권V>의 주제가로 화려하게 장식된다. 그 현란한 과장과 능청스러운 농담은 <품행제로>의 배경이 80년대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30, 40대에게 80년대는 추억의 현장이지만, 젊은 세대에게 80년대는 촌스럽지만 정감있는 신세계인 것이다.
<품행제로>는 가벼우면서도 진심어린 마음으로 중필과 민희, 그리고 나영에게 박수를 보낸다. 모범생이지만 당찬 구석이 있는 민희와 순진한 양아치 중필의 캐릭터는 사랑스럽고 시선을 끄는 매력이 있다. 그건 역시 배우 덕이 크다. 80년생인 류승범의 80년대는 기껏해야 코흘리개 소년이었겠지만, 약간은 투박하게 생긴 얼굴과 천연덕스러운 연기 덕에 80년대의 아이콘으로 부족함이 없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에서의 무표정한 얼굴 대신에 순수하면서도 당돌한 민희를 연기한 <품행제로>의 임은경은 생기가 돈다. <품행제로>는 임은경의 미래가 여전히 밝음을 증명했다. 공효진은 여전히 탁월한 연기를 보여주지만 나영이라는 인물의 캐릭터와 상황은 TV드라마 <화려한 시절>과 <네 멋대로 해라>를 반복하고 있다. 이제는 공효진에게 다른 표정과 말투도 필요할 때가 아닐까
(왼쪽부터 차례로)♣ 중필이 숙취에 시달리면서도 동네 꼬맹이들에게서 돈을 뜯는 유도부 녀석을 혼쭐내는 장면은 이 영화의 코믹액션의 백미.♣ 첫사랑과 함께 중필은 점점 변해간다.♣ 여고의 `캡짱` 나영도 중필을 좋아한다. ♣ `첫키스를 하면 종소리가 들린다더라`는 민희와 중필의 첫키스 장면에 울려퍼지는 종소리는 둘의 귀여움을 한껏 강조한다.
묘하게도 영화 속의 80년대는 모든 것을 용서한다. 지금 한국영화 속에 그려지는 80년대는, <그들도 우리처럼>이나 <장미빛 인생>의 80년대가 아니다. 정치와는 동떨어진 유희의 공간으로서의 80년대다. 그 유희의 공간 속에서 2002년의 청춘영화들은 맹렬하게 성과 사랑을 소비하고 있다. <픔행제로>의 분명한 장점은 순진하고, 설교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10대를 바라보고, 그들의 일상을 즐겁게 묘사하는 데 우선 순위를 둔다. 너무 허황되지 않고, 지나치게 낭만적이지 않으면서도 쾌활하고 제멋대로인 <품행제로>는 매우 반가운 영화다. 무대가 지금 이곳이었다면 더욱 좋았을.김봉석/ 영화평론가 lotusid@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