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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 O.S.T
2002-12-20

그로테스크와 냉소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이라는 긴 제목의 영화는 이무영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이다. 동성애를 낀 삼각관계를 비롯해 비현실적인 관계 설정들이 다소 엽기적인 방식으로 등장하는데, 그 가운데 이무영 감독 특유의 자유분방한 사고방식들이 배어 있다.

음악은, 이런 식의 그로테스크한 리얼리즘을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데 상당히 적합한 사람들이 맡아서 했다. 바로 장영규와 백현진, 달파란을 비롯한 일련의 사람들이다. 근래 들어 한국 영화음악의 작업이 집단화되는 경향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주도하는 가장 대표적인 그룹은 역시 ‘M&F’일 것이다. 조성우를 중심으로 모인 뮤지션 그룹인 M&F는 녹음이나 배급까지도 자체적으로 해결해낼 능력을 갖추고 있다. 아무래도 음악의 생산이 민첩하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작업이 영화음악인 만큼 이런 능력을 갖춘 집단이 영화음악산업의 합리화를 위해 필요할 것이다. 또 다른 집단이 장영규, 달파란, 방준석, 백현진 등을 위시한 그룹이다. 이들은 M&F에 비해서는 좀더 이완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집단으로 보인다. 아마도 ‘뮤지션 프리랜서 집단’이라 칭해도 무방할 이들은 그때그때 작업의 성격이나 규모에 따라 자유롭고 기민하게 모였다가 흩어진다. 그래서 이들이 생산해내는 음악은 음악적 성격의 폭도 넓고 장르도 굉장히 분방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번 영화음악은, 지난번에 <해안선> 영화음악을 소개할 때 언급한 바 있는 장영규가 상당 부분을 소화해냈다. 가사가 있는 노래들이 O.S.T에 여러 곡 실려 있는데, 가사는 모두 백현진(어어부)이 맡아서 썼다. 가사의 내용이 엽기적이고 써늘한 느낌이 들면서도 지극히 일상적인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백현진 특유의 뼈아픈 환상적 리얼리즘이 발휘되어 있는 가사들이다. 영화와 꼭 맞아떨어지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 가사들은 틀림없이 자체로도 음미할 만한 무엇을 지니고 있다.

리듬 파트의 많은 부분은 달파란이 편곡했다. 이번 앨범의 전체적인 리듬 기조는 ‘라틴’인데, 그렇다고 해서 라틴 특유의 따스하고 열정적인 ‘적도 분위기’가 그대로 살아 있지는 않다. 이들은 라틴의 따스함을 묘하게 ‘아이스’처리하고 있다. 그래서 라틴은 라틴인데 냉랭한 느낌이 감돈다. 한편으로는 쿨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냉소적이기도 하다. 장영규가 본래 지니고 있는 뉴웨이브적 감수성하고 달파란이 지니고 있는 하우스적 감수성이 라틴을 중심으로 뒤섞이면서 내는 효과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묘한 리듬의 특성은 영화의 분위기와 일정하게 같이 가지 않나 싶다.

트랙별로 조금 살펴보자. O.S.T를 열고 있는, 주제가에 해당하는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을 위한…>이라는 제목의 노래는 위의 분위기를 집약시키고 있는 노래다. 백현진의 백수광부 같은 보컬과 묘한 리듬, 특유의 냉소적이고 지적인 느낌들이 살아 있다. 이런 분위기와 약간은 다른, 좀더 낭만적인 느낌이 드는 3곡의 노래들에는 <Blue in Green>이라는 크레딧이 붙어 있다. 또 장영규와 함께 여러 곡에서 어레인지를 함께하고 있는 이병훈 역시 <주인없는 빈잔>이라는, 마치 김현식이 부르면 딱일 것 같은 느낌의 노래를 지어 O.S.T에 싣고 있다.

O.S.T의 압권은 역시 한대수와 백현진의 더블 보컬이 이끌고 있는 <구멍난 그림자>라는 노래다. 음악도 좋지만 가사가 짱이다. 게다가 나이차가 꽤 되는 한대수와 백현진의 목소리가 빚어내는 묘한 조화라니! 리듬은 약간 부드러운 하우스를 채택하고 있지만, 술 취한 듯 미친 듯 불러젖히는 두 보컬리스트의 주고받음은 다른 데서는 느낄 수 없는 특유의 유장함을 전해주고 있다. 현실의 한켠은, 정말 ‘구멍난 그림자’처럼 뻥 뚫려 있고, 그 속으로 들여다보면 세상은 참 그로테스크하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