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3시, 회사 건물은 어김없이 환해진다. 수위 아저씨가 문을 열고, 청소 아주머니가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몇십년을 한결같이 살아온 분들. 이들과 새벽에 마주치는 순간, 삶에는 먹고 자는 것 이상의 신성한 의미가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무엇이 모진 비바람을 견디게 하고, 저토록 평화로운 표정까지 만들어냈을까. 자기 자리에서 성실하게 삶을 지켜온 사람만이 낼 수 있는 그 표정을, 단편 <등대지기>에서 보게 됐다.
김준기 감독이 만든 <등대지기>는 8분40초 분량의 3D애니메이션이다. 2002년 대한민국애니메이션대상 특별상을 수상한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따스함이다. 내용과 영상이 모두 따뜻한 느낌. 3D 영상임에도 이런 이미지를 그려낼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 자꾸 들여다보게 된다.
기술적으로도 대단하게 뛰어난 것처럼 보이지 않는 <등대지기>가 빚어내는 따스함은, 바로 주인공 두보에게서 비롯된다. 느릿느릿한 움직임과 넉넉한 표정.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에 등장할 법한 눈송이들도 따스한 느낌에 한몫한다.
옛날 어느 작은 섬에 등대지기가 살고 있었다. 등대지기의 이름은 두보. 그가 하는 일은 마을의 가로등과 등대를 켜는 일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등대지기는 정해진 시간에 불을 켰다. 두보가 켜놓은 가로등에서 불을 옮겨, 집안을 밝히고 음식을 만들고 밤길을 다닐 수 있음에도, 마을 사람들은 그를 핍박하고 무시했다. 투박하고 순하게 생긴 그가 만만해 보였음인지, 바보라고 업신여겼음인지 하나같이 그를 구박했지만, 구보는 언제나 자신의 일을 성실하게 수행했다.
가로등에 이어 등대까지 밝히면 하루 일과가 끝나는 두보. 등대 꼭대기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그는 책상에 앉는다. 그런데, 웬일인지 책을 앞에 두고도 정작 자신을 위해서는 불을 밝히지 않는다. 달빛 비치는 창가에서 두보가 손으로 짚어가며 읽는 것은 다름 아닌 점자책이었다. 불을 켤 때마다 손을 대보던 것은 추워서가 아니라 점화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장면과 장면이 이어지는 부분에서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등대지기>는 가슴 뭉클한 어떤 것을 전해주는 데 성공했다. 김준기 감독이 전작 <생존>이나 차기작 <인생>에서도 줄곧 추구하고 있는 주제는 바로 ‘인간’이다. 인간에 대한 이야기,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이야기를 앞으로도 계속 표현하고 싶다고 그는 말한다.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에게 환하게 웃어주는 두보의 모습이, 모두가 외면한 자리에서 즐겁게 살아가는 두보의 얼굴이, 회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청소 아주머니와 수위 아저씨의 표정과 정말이지 닮아 있다.
허무하고 지리멸렬하고 우울한 기분 따위, 응석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위대한 힘은 바로 이들의 삶에 대한 성실한 자세다. 그 모습은 자기 작품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고군분투하는 작가와도 일면 흡사하다.
젊음은 고통에 노출되지 않은 시기라고 누군가는 말했다지만, 주어진 삶을 곧이곧대로 살아내고도, 평화로운 표정으로 눈감을 수 있다면, 하는 궁극의 소원이 간절해지는 요즘이다. 적절한 자리는 아닌지 모르겠지만, 이 지면을 빌려 요즘 유난히 힘들어하시는 것 같은 우리 회사 청소 아주머니와 수위 아저씨께 기운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힘내십시오. 김일림/ 월간 <뉴타입> 기자 illim@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