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 아이들과 읍내 주민들의 어색한 연기는 <서세원의 좋은 세상 만들기> 같은 TV프로그램을 상기시킨다. 한동안 큰 인기를 끌었던 이 TV프로그램은 시골 노인들의 서투름과 순박함을 한편으로 비웃고 다른 한편으로 연민한다(그 비웃음은 우리가 낯선 것과 마주쳤을 때 생기는 긴장을 해소하기 위한 일시적 방편으로서의 비웃음이라는 점, 그리고 그 비웃음을 결국 연민으로 해소한다는 점 때문에 나는 이 색다른 오락프로그램이 어떤 교양프로그램 못지않게 윤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집으로…>에서 일부 배우들의 서투름은 TV체험을 통해 우리에게 매우 낯익으며, 우리는 익숙한 방식으로 그들의 서투름을 비웃고 연민한다.
좀더 중요한 다른 하나는, <집으로…>의 컨텍스트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수시로 출몰하는 그 서투름은 이 영화가 충무로 자본과 충무로 감독이 그동안 충무로가 소외시켜온 대상을 찾아나선 윤리적 여정임을 영화를 보는 동안 내내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보통의 소격효과라면 감정적 동일시를 차단하겠지만, <집으로…>의 경우엔 관객에게 익숙해진 시골 노인에 대한 비웃음과 연민을 경유해 더 큰 정서적 공명을 낳는 것이다. 그러나 <집으로…>는 타자를 연민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집으로 …>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마지막에 등장한다. 아이는 떠나고 할머니는 시골에 남는다. 카메라는 아이의 시선으로 남은 할머니를 관찰하며 연민을 과장하는 게 아니라, 할머니와 함께 남아 산길을 오른다. <집으로…>는 할머니라는 타자를 포옹하며 그와 연대한다.
<오아시스>, 박해받는 타자들
<오아시스>와 <죽어도 좋아>에는 <집으로…>의 상우 같은 인물이 없다. <집으로…>는 관객의 대리인이 중심인물로 등장해 타자와 포옹함으로써 타자의 낯섦을 내러티브 안에서 해소하는 반면 <오아시스>와 <죽어도 좋아>에서 교감과 사랑은 타자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진다. 낯섦은 해소되지 않으며, 타자들은 우리에게 포섭되지 않고 그들의 세계에 남는다. 두 영화는 그래서 <집으로…>보다 불편하다. 그러나 두 영화가 타자들의 사랑을 다루는 방식은 같지 않다.
<오아시스>에서 사랑에 빠진 두 타자는 가족과 주변인들에게 시종 박해받는다. 관객이 차라리 동일시하게 되는 건 두 타자가 아니라 타자를 억압하거나 배제하는 주변의 가해자들이다. 여기서 주인공 종두의 위치는 애매하다. 그에게서 일반적 장르영화에서의 반영웅의 면모를 발견하기란 힘들지만(<친구>의 준석과 동수 같은 반영웅은 한국사회의 타자이지만 한국영화의 친구다), 관객으로서의 우리는 우리에게 매우 낯익고 정겨운 설경구라는 배우를 통해 체현된 그 인물을 친구로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 그러나 종두는 그 기대를 점점 벗어난다. 종두는 타자와 우리의 가운데 어디에선가 서성이다 우리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그는 스스로 타자화한다.
그는 먼저 내러티브 안에서 가족들의 타자가 된다. 종두 가족의 잔치장면은 그 과정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종두는 초대되지 않은 손님 공주를 데리고 온다. 스크린 속의 가족에게도 스크린 밖의 우리에게도 공주는 받아들이기 힘든 존재다. 그의 심하게 비틀린 육신은 일말의 동정은 유발할지언정 인간적 혹은 성적 유대를 소망케 하긴 힘들다. 우리는 종두의 난데없는 행위의 결과를 알고 있다. 또다시 잔치는 엉망이 되고(이창동 감독은 매번 잔치판을 난장판으로 끝맺는다), 종두에게 마지못해 발부된 초대장도 폐기된다. 종두는 개의치 않는다. 그는 초대를 원치 않으며, 오히려 추방을 자초한다.
동시에 종두는 관객으로서의 우리에게도 말을 건네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오아시스>의 내러티브는 끝내 종두를 이해시키지 않는다. 경찰서에 다시 끌려갔을 때 종두는 자신이 강간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것이 의지의 부재 때문인지 능력의 부재 때문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의 주변인들이 그를 착취하긴 했으나 그런 의지와 능력마저 빼앗은 기억은 없다. 종두는 끝내 우리를 설득하지 않고 공주의 손을 잡을 뿐이다. 우린 결국 그들에게 다가갈 수 없다.
그들이 관객에게 불현듯 손을 내미는 짧은 순간들이 있다. 우리는 관객의 특권으로 극중의 다른 인물들이 볼 수 없는 그들의 판타지를 목격한다. 지하철에서 노래하거나 코끼리와 나비와 새들을 벗하는, 너무 진부해서 차라리 애처로운 이 판타지는 우리의 일상이나 유년기의 기억과 같은 가장 친근한 것과 소통하지만 곧장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내러티브상으로 다가갈 수 없었던 인물들과 짧은 판타지의 순간에만 만나도록 허락한 <오아시스>의 이야기는 그런 면에서 잔인하다.
<오아시스>는 한 남녀의 사랑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배타’라는 우리의 죄에 관한 고백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아시스>의 이야기는 우리의 배타를 해소할 길를 알려주지 않는다. <오아시스>의 타자들은 우리의 죄를 징벌하거나 탓하지 않고 결국 그들만의 성에 스스로를 가두며 웃는다. 종두의 따뜻하고 쾌활한 편지가 햇볕이 스며드는 공주의 방에서 읽혀질 때, 그들을 지켜보던 관객으로서의 우리는 왜소해지고 우리의 ‘배타’는 애매해진다. 이 결말은 타자가 우리를 역으로 타자화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그들은 우리로부터 멀리 떠나(혹은 추방되어) 오아시스를 발견했지만 우리에게 그들의 오아시스는 신기루일 뿐이다. 타자와의 조우는 궁극적으로 실패했고, 이 결말은 밝은 톤에도 불구하고 따라서 매우 비관적이다.
<죽어도 좋아>, 타자성=즉물적 이미지
<죽어도 좋아>는 내러티브 안에 70대 노인이라는 낯선 주인공들을 타자화하는 시선의 주체가 없다. 그들의 타자성은 내러티브 안에서 확인되거나 강화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즉물적 이미지로 제시된다. 낯섦은 고스란히 전시되며 우리는 그 낯선 이미지를 그냥 지켜봐야 한다. 이 점 때문에, 감독이 다큐멘터리 PD 출신이며 그가 다큐멘터리 제작과정에서 만났던 실존 인물의 실화를 당사자들이 연기했다는 사실을 모른다 해도, <죽어도 좋아>는 다큐멘터리보다 더 다큐멘터리적으로 느껴진다.
알려진 대로 이 영화는 두 노인의 정사장면이 사실적으로 그리고 길게 묘사된다. 물신화가 불가능한 이들의 노쇠한 육체는 우리의 관음적 시선을 괴롭힌다. 그 육신을 보고 부산에서 이 영화를 극찬한 평론가 도널드 리치처럼 아름답다고만 말할 엄두는 나지 않는다. 검버섯이 곳곳에 피고 주름이 여러 갈래 진 살덩이가 겹쳐지는 장면을 보기란 민망하거나 심지어 괴롭다. 그럼에도 영화 전편엔 기묘한 생동감이 넘쳐 흐른다.
<죽어도 좋아>의 이야기는 극히 단순하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나 사랑을 느낀다. 둘은 섹스를 하고 다투기도 하지만 결국 함께 살아간다. 그게 전부다. <죽어도 좋아>는 가장 단순한 형식의 멜로드라마다. 적나라한 정사장면을 빼면 이야기만으로는 단편 분량에 불과한 이 영화는 연애담의 원형적 요소만으로 구성돼 있다. 두 남녀의 서로에 대한 감정 외엔 어떤 외적 요소도 가담하지 않는 것이다. 가족관계는 물론이고 일체의 사회적 관계가 이들의 애정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바꿔말하면 이건 현실적으로 존재하기 힘든 로맨스의 이념형이다. 대중적 서사로서의 가치가 전무해 보이는 이 원시적 이야기가 70대 노인의 육신과 결합하면서 괴력을 발휘한다. <죽어도 좋아>의 1차적 충격은 멜로드라마의 타자가 로맨스의 이념형을 실현한다는 이 아이러니에 있다.
이 아이러니의 믿기 힘든 실현이 정교한 이야기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적인 실재감과 즉물적 이미지로 전해진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들의 육신과 표정과 동작을 인류학자적 성실함으로 담아낸 카메라의 힘이다. 여기서 이야기의 과도한 단순성은 낯선 주인공들의 이미지가 내러티브의 성긴 망을 뚫고 즉물적 생동감을 발휘하는 데 기여한다. 60여분의 짧은 러닝타임에 비해 지나치게 길어 보이는 이들의 사실적 정사 장면이야말로 이들의 낯선 이미지가 정점에 이르는 순간이다. <죽어도 좋아>는 타자성을 고민하지 않고 타자의 이미지에서 생의 감각을 포착한다. 그건 한국영화에서 가장 낯설고 진귀한 체험 가운데 하나다. 허문영 moon8@hani.co.kr
(이 글의 <집으로…>에 관한 부분은 <창비 웹진>에 게재한 필자의 글 중 일부를 수정해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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