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도 좋아>는 어떻게 보면 노년에 만나 정열적인 사랑에 빠진 두 노인의 섹스일기이다. 두 노인의 사랑은 젊은이들 못지않게 열렬하며, 서로의 몸에 대한 탐닉 역시(특히 횟수) 젊은이들 뺨친다. 다큐멘터리의 연장선상에서 만들어진 극영화이기도 한 이 영화가 표방하고 있는 자연주의적 수법은 한편으로는 충격적이다. 섹스를 하고 있는 노인들의 실물이 우리 앞에 있는 것이다. 관객은 그 능숙하지 않은, 영화적으로 길들여져 있지 않고 유연하지도 않은 노년의 몸들이 뒹구는 장면 자체를 메시지 이전에 받아들이게 된다. 그 그로테스크한 현실은 하이퍼 현실이고, 우리는 어떤 표본실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사랑의 보편성, 혹은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몸의 보편성 같은 전언이 이 영화의 테마일 수도 있지만 정작 그 ‘몸’ 자체가 테마다. 메시지도 중요하지만 우리에게는 그 몸들의 살아 꿈틀대는 실물감이 먼저 다가온다. 이 영화는 그러한 실물감을 내러티브나 메시지보다 우선시한 한국 초유의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재미난 것은, 오히려 실물감을 살리기 위해 거기에 ‘장치’들이 필요하다는 점. 현실에 있을 욕조 대신 ‘실물감의 세계’, 하이퍼 리얼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다라이가 동원된다. 사운드도 그런 식이다. 자세히 귀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동네의 잡음들이 그대로 살아 있는 다큐멘터리적인 사운드이다. 이런 사운드라면 그냥 마이크만 갖다대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하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그 ‘동네 잡음’ 같은 사운드를 전부 죽이겠다고 마음먹고 거기다 새로운 사운드 소스를 입히는 일이 오히려 쉽다. 이걸 살리려면 동시에 거기 섞여 있을, 그 ‘실물감’을 방해하는 소리들은 일부러 지우면서 녹음해야 한다. 어떤 대목에서는 그게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전혀 다른 현장이나 같은 현장이라도 다른 시간대에서 따온 소리들을 배경에 깔아야 하는 때도 있다. 이 영화가 그랬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대학을 졸업하고 주로 TV용 다큐멘터리 만드는 ‘일’을 해온 박진표 감독은 그런 실물감 있는 사운드를 따내는 일에 상당히 능숙하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이런 사고방식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볼 때, 음악 중에서 가장 먼저 귀에 들어오는 것은 <청춘가>이다. 영화는 아예 박치규 할아버지께 이순예 할머니가 <청춘가>를 가르치는 대목을 그대로 싣고 있다. 이미 청춘을 지나친 노인네들이 절절한 목소리로 한 소절씩 따라 부르는 <청춘가>는 특유의 리얼한 매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것들은 정말 그 음악의 우리 이름처럼, ‘소리’이다. ‘소리 한마디 허시게’하면 목구멍에서 나오는 게 바로 소리이다. 그 소리는 목구멍의 구조 그 자체이다. 서양의 ‘성악’이 목구멍의 구조를 일정하게 ‘기계화’시켜서 나오는 인공적인 소리라면, 우리의 소리는 떨리고 요동치면서 결과적으로 ‘울리는’ 것이 목적인 목청의 물질성을 있는 그대로 다른 사람의 고막에, 그리고 가슴에 전달시키는 파장 자체이다. 이와 같은 ‘실물감’을 가사와 음의 높낮이와 장단을 통해 통째로 전하는 것이 ‘소리’이다. 이 영화는 그런 의미에서 ‘소리’의 정의에 근접한 소리를 담지 않았나 싶다. 조성우의 ‘M&F’ 소속인 박기헌이 전해주는 따스하고 잔잔한 멜로디가 그 실물감 있는 소리들과 더불어 O.S.T에 실려 있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