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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아니라 철학으로 보는 시간여행,<도니 다코>
2002-12-05

희생과 구원의 입체퍼즐

spoiler warning : <도니 다코>는 개봉 이틀 만에 대부분의 극장에서 떨어졌습니다. 보신 분이 별로 없을 듯한데, 이 글은 온통 스포일러입니다. 비디오로 영화를 보기 전에는 읽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도니 다코> 역시 반전이 대단히 중요한 영화이니까요.

<도니 다코>는 시간여행에 관한 영화다. 그게 정말일까 도니가 시간여행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미래에서 왔다’는 프랭크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도니는 과학선생에게 시간여행에 대해서 물어본다. ‘죽음의 할머니’가 쓴 <시간여행의 철학>이라는 책을 읽으며 도니는 사람들의 가슴에 뚫려 있는 웜홀을 본다. 이쯤 되면 <도니 다코>는 시간여행이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상하다. <도니 다코>에 나오는 시간여행은 과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가슴에 웜홀이 있다는 것도 과학적 증거와는 관련이 없다. 시간여행의 ‘철학’ 갑자기 시간여행에서 왜 철학이 등장하는 것일까. <도라에몽>에서처럼 미래의 여행자들이 과거를 어지럽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철학과 법률이라도 필요해진 것일까

철학, 시간여행에 첨가된 주제

<도니 다코>는 앞과 뒤가 맞물려 있다. 어쩌면 도니 다코는 결말을 미리 알고, 즉 미래의 사건을 접하고는 그것을 되돌리기 위해서 과거로 온 것일 수도 있다. 일단 간단하게 생각해보자. 도니는 그레첸의 죽음을 본 뒤 모든 것을 되돌리기 위해 과거로 온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비행기의 엔진이 떨어졌을 때 도니가 골프장이 아니라 방에 있었다면, 도니는 죽었을 것이다. 그때 도니가 죽었다면, 도니와 그레첸은 만나지 않았을 것이고, 도니와 그레첸이 ‘죽음의 할머니’의 집에 함께 가서 그레첸이 죽는 사고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도니 다코>는 언뜻 보기에 모든 것이 치밀하게 얽혀 있는 것 같다. 도니가 짐 커닝햄의 집에 불을 지르지 않았다면, 그가 집에 숨겨놓은 아동 포르노는 발견되지 않았고 체포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체육선생이 그의 재판에 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도니의 엄마가 대신 아이들을 데리고 대회에 나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학에 입학한 누나의 축하파티를 부모님이 없는 집에서 열지도 않았을 것이고, 프랭크도 파티에 와서 술을 마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어느 하나만 빗나가도, 그레친의 죽음은 오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도니 다코>의 시작은 세계의 종말이 28일 6시간42분12초 남았다는 프랭크의 말을 들은 뒤 골프장에서 깨어나는 도니다. 과거에 개입하는 것은 미래의 인간이다. 미래에 죽은 프랭크의 유령이 도니에게 말을 걸고 있지만, 진짜 프랭크 즉 아직 살아 있는 인간인 프랭크는 그 순간 어딘가에서 활기차게 아침을 시작하고 있을 것이다. 만약에 프랭크가 도니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면, 도니는 시간여행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고, ‘죽음의 할머니’가 쓴 <시간여행의 철학>도 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미래의 간섭이다. 미래의 간섭이 없었다면 도니와 그레첸이 만난다 해도, 그레첸의 죽음은 없었을 것이다. <도니 다코>의 영화적 시간은 이미 지난 과거이고, 되돌려진 시간은 도니의 죽음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도니 다코는 프랭크의 목소리를 듣고, 사고를 친다. 학교를 엉망으로 만들고, 방화를 한다. 그런데 이미 과거에도 도니가 방화를 했다는 사실이 약간의 의심을 하게 만든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단지 도니의 환상이 아닐까. 그가 들은 목소리는 그의 또 다른 자아, 파괴의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 무의식이 아닐까. 하지만 무의식으로 설명하기 힘든 장면이 있다. 짐 커닝햄을 숭배하는 체육교사는 그레이엄 그린의 <파괴자> 같은 사회부정적인 교재로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보수주의자다. 노골적으로 부시를 지지한다. 체육교사의 부탁으로 짐 커닝햄은 도니의 학교에서 강의를 한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가르침으로 학생들을 교화시키려 한다. 그때 도니 다코는 정면으로 반발한다. 그리고 ‘변태’라고 외친다. 그건 마치 침대에 누운 도니가 다정하게 말하는 어머니에게 ‘bitch’라고 말하는 장면과도 같다. 정신병의 여파로, 사태를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하고 일시적인 감정을 극단적으로 발산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극장에서 영화를 보다 나와서 방화를 하고, 짐 커닝햄이 아동 포르노를 찍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발견하게 된다. 도니 다코는 그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기억이 도니 다코의 무의식에 들어가 있었던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도니 다코>의 시간은 미래에서 되돌려진 과거가 아니라, 뫼비우스의 띠처럼 과거와 미래, 현실과 환상, 의식과 무의식이 얽힌 것이 된다. 이 지점에서 <도니 다코>는 과학을 포기한다. 아니 벗어난다. 과학적인 인과관계가 아니라, 철학과 종교 그리고 신비주의로 <도니 다코>는 흘러간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미래에서 되돌려진 도니 다코는 이미 죽었어야 하는 것이다. 미래의 기억 따위가 이미 지나버린, 즉 되돌려져서 존재하지 않아야 할 과거에는 남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조금 더 신비주의로 들어가, 모든 시간의 기억이 담긴 어딘가에서 이를테면 우주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정보가 담겨 있다는 ‘아카식 레코드’ 같은 것에서 미래를 보고 돌아와 바꾸려는 것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도니 다코>는 신비주의로 관객을 인도하는 영화가 아니다.

왜 <이블 데드>인가, 왜 <예수 최후의 유혹>인가

할로윈 기념 특별상영에서 동시 개봉하는 영화가 왜 하필이면 <이블 데드>와 <예수 최후의 유혹>인 것일까 샘 레이미의 <이블 데드>는 귀신들이 출몰하는 할로윈용 영화이지만, <예수 최후의 유혹>은 부활절에나 어울리는 영화다. 도니는 그레첸과 함께 극장에서 <이블 데드>를 보다가 프랭크를 만난다. 그렇다면 <예수 최후의 유혹>은 도니가 다른 세계에서 보고 있던, 아니 보아야만 하는 영화일까 마틴 스코시즈 감독의 <에수 최후의 유혹>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아버지,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던 순간의 ‘환상’을 그리고 있다. 자신을 회의한 예수는 십자가에서 내려와 막달라 마리아와 가정을 꾸리고 평범한 일상을 살아간다. 그렇게 그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가 아니라, 나사렛의 목수 예수로 살아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난 예수는 자신의 존재와 의무를 받아들인다. 예수는 자신을 희생하고, 인간을 구원이 가능한 존재로 규정짓는다. 도니 다코가 자신의 희생으로 모든 것을 되돌려 놓듯이.

<도니 다코>의 희생과 구원의 드라마는 치밀하게 전개된다. 그레이엄 그린의 <파괴자>는 말 그대로 파괴하는 사람의 이야기다. 그들은 알고 있다. 창조를 위해서는 파괴가 필요하다는 것을. <파괴자>를 영어시간에 가르쳤다는 이유만으로 선생이 학교에서 쫓겨나야만 하는 <도니 다코>의 시대는 1988년이다. 레이건의 시대 8년이 지나고, 다음 대통령을 뽑는 선거에서도 여전히 부시의 우세가 점쳐지던 시대. 그 시대의 끔찍함을 알고 싶다면, 지금 아들 부시의 시대가 8년간 이렇게 지속되었을 때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쉽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선과 악으로 갈리고, 미국과 지배계급이 악으로 규정하는 모든 것들은 절멸되어야만 하는 광기의 시대. 그 광기의 시대를 벗어나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파괴가 필요하다. 도니 다코의 누나가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인 듀카키스를 지지하고, 도니 다코가 분열증에 시달리는 것은 이유가 있다. <아이스 스톰>의 10대가 혁명을 버리고 무책임과 방종으로 치달리고 있는 부모들을 비판했던 것처럼, 80년대의 10대는 자신만의 안위와 평온을 위해 양심의 눈을 닫아버리고 레이건을 지지했던 부모들을 비판한다. 도니 다코의 ‘비치’라는 욕설은, 정신병 치료약의 부작용이 아니라 부모 세대를 향한 10대의 항변이다.

그러나 도니 다코는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은 세상을 파괴할 수도, 세상을 바꿀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앞으로도 4년 동안을, 그들은 부시 정권 아래에서 살아야 한다. 아니 클린턴의 민주당 정권이 8년 동안 존재했음에도, 세계는 변화하지 않는다. 듀카키스나 부시나 본질은 다르지 않다. 그들은 영원히 패배할 수밖에 없는 가련한 존재인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도니 다코는 사랑하는 여인 그레첸을 위해 세상을 되돌린다. 그것만은 가능하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시간을 되돌리는 것은 가능한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되돌려지고 그레첸은 도니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것이 도니의 희생으로 가능해졌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예수의 마지막 유혹>이 말해주듯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예수 역시 강렬한 유혹에 이끌렸을 것이다. 행복하게 살고 싶은 욕망과 세상의 악과 부정을 구원하고 싶다는 양심의 목소리 사이에서. 도니 다코는 단지 하나만을 택했다. 자신을 희생하여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고, 그리고 세상이 바뀌는 것을. 그렇게 하나의 희생이 세상을 바꿀 수도 있음을, <도니 다코>는 암시한다. 아니 그런 누구도 알지 못하는 희생이 존재하기 때문에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속삭인다. 비행기 엔진에 맞아 도니 다코가 죽고, 카메라는 세상의 사람들을 비춘다. 그중에는 도니의 희생으로, 죽음에서 비껴나간 프랭크의 모습도 있다. 엽기적인 토끼 가면을 그리는 프랭크는 죽지 않고 살아남아, 이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그것이 도니의 희생 때문인지는 알지 못하고.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이 늘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란 자명한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김봉석/ 영화평론가 lotusid@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