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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력있고 뜻있는 영화,<죽어도 좋아>
2002-12-03

■ Story

칠순의 박치규 할아버지와 이순예 할머니는 첫눈에 서로 사랑에 빠져 정화수 한 그릇 놓고 결혼식을 올린다. 장구 치며 노래를 가르치는 아내, 한글을 깨우쳐주며 훈장 노릇 하는 남편, 밤 늦게 귀가해서 남편을 애끓게 하는 아내, 투정을 너무 부리다가 아내를 울리고 마는 남편, 몸이 아픈 아내, 종일토록 곁에서 수발드는 남편으로서의 일상이 정답게 흘러간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들 노부부의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성생활이다.

■ Review

올 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죽어도 좋아!>가 처음 공개되었을 때 관객은 쉽사리 극장을 떠나지 못하고 삼삼오오 거리에 모여 서성댔다. 그건 유쾌한 흥분이었다. 이번에 다시 영화를 볼 때에는 뜻밖에도 첫 장면의 잔잔한 음악이 시작되자마자 울컥 하는 기분이 들더니만 끝내 젖은 눈으로 앉아 있었다. 선하고 충만한 사랑 때문이었다. 허다한 청춘과 청춘영화들이 사랑의 부재에 절망하는 제스처를 취하며 세월을 보내는 와중에, 사랑의 존재를 온몸으로 증명하는 사람들이 칠순의 실제 부부라는 사실이 이중의 낯선 감동을 주었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은 짧지만 효과적인 도입부 역할을 해준다. 거리의 담배판매대에 앉아 있는 박치규 할아버지의 얼굴을 다소 올려잡은 카메라의 시선으로 보여준 다음, 수납구 밖으로 약간 걸쳐진 채 미동도 하지 않는 손으로 클로즈업한다. 세상의 모든 비밀을 터득했지만 눈을 내리깐 채 아무것도 모르는 체하는 노인의 시선, 움직이지 않는 주름진 손, 눈발이 흩어지는 겨울 거리가 불러일으키는 서정적인 느낌은 대가의 명화 한폭을 보는 듯했다. 첫 장면이 위력적인 이유는 노인 세대를 바라보는 내 자신의 관점을 간단명료하게 요약해주기 때문이다. 청장년층은 어떤 의미에서 사회의 지배자로 군림한다. 지배자의 눈으로 보기에 노인이란 삶의 에너지가 고갈된 채 지상에서 사라질 날만 기다리는 무력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내복 바람으로 방 안에 앉아 틀니를 손질하는 다음 장면도 마찬가지 효과를 낳는다. 그러나 67분이라는 짧은 상영시간을 갖고 있는 <죽어도 좋아>는 이렇게 간단히 서두를 연 뒤, 나머지 60여분을 이같은 편견에 대한 폭풍 같은 반격에 바친다.

공원 벤치에서 서로를 발견한 두 사람은 일체의 과정을 생략한 채 바로 동거에 돌입한다. 박치규-이순예 커플의 실제 결혼과정이 그랬는지 아니면 작가와 감독이 극화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이야기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나에게 이 장면은 무척 통쾌하게 여겨졌다. 재산분배나 수발들기 같은 이해타산을 저울질하려는 젊은 사람들이 노인의 체면을 지킨다는 명분 아래 자손의 동의니 주변의 축하니 하는 허섭스럽고 주제넘은 절차를 내세우는 것을 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두 주인공이 여러 번에 걸쳐 실제로 섹스하는 장면들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등급 분류를 둘러싼 논란이 컸지만 여론 주도층과 국제영화제의 역할에 힘입어, 일부 장면을 어둡게 색보정하기는 했지만 삭제하지 않고 개봉하는 결실을 맺었다.

이 사안은 여전히 곱씹어볼 만한 쟁점을 내포하고 있다. 검열은 100여년에 걸친 한국 영화사에서 가장 큰 쟁점 사안 중 하나다. 일본제국주의와 군사독재가 전체 역사의 2/3 이상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죽어도 좋아>건은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국가권력으로부터 비롯된 검열이 아니라, 시민사회 내부의 윤리적 갈등으로 그 중심이 옮겨간 경우다. 윤리적인 입장 차이는 토론할 수는 있어도 비난하기는 어렵다.

한국사회에서 성은 문화적으로 가장 크게 재검토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성을 둘러싼 교육과 제도를 설계하는 우리의 기본 패러다임은 그것을 필요악으로 바라보는 관점에 입각하고 있다. 섹스를 공개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도록 금하는 것은 비단 보수적인 등급심사위원회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의 의식적인 지표다.

<죽어도 좋아>는 섹스를 표현하는 방법과 수위에 대한 우리 사회 전반의 합의를 충격적으로 위반하는 영화다. 두 주인공이 실제로 섹스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시청각적으로 너무나 분명하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갑자기 이 영화를 그토록 옹호하는 것일까 표현이 예술적이라고 둘러댈 만한 구석도 없건만.

(왼쪽부터 차례로)♣ 칠순의 실제 부부인 박치규 할아버지와 이순예 할머니는 첫눈에 사랑에 빠지고, 결혼식을 올린다.♣ 함께 노래하고, 서로 글을 가르치고, 몸이 아플 때 간병하며 지내는 두 부부. 그러나 이들의 삶에서 무엇보다 중심이 되는 건 성생활이다.

그것은 아마도 억압되었던 존재에 대한 발견과 죄의식이 아닐까 싶다. 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패러다임에서 가장 크게 배제되는 대상은 미성년, 여성, 노인의 섹슈얼리티다. 억압된 것들은 어떻게 해서든 되돌아와 반격한다. 최근 여성과 미성년자의 성문제를 다룬 에로티시즘영화들이 극장가에 하나둘씩 나타나 흥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 예다. 특히 <죽어도 좋아>는 지금껏 한번도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노인이 주인공으로 나와 섹스를 둘러싼 윤리와 관습의 심장부로 돌격하는 급진적인 영화다. 우리는 이 영화가 극장에 내걸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임으로써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뒤를 따라 걸으며 이 사회 전체의 윤리 체계를 바꾸자고 자신도 모르게 발자국으로 서명한 셈이 되었다.

<죽어도 좋아>는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경계 지점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다. 이 영화에서 감독의 위치는 주인공의 삶을 관찰하고 기다리는 위치에 가깝다. 그가 이야기를 꾸며낸 사람이 아니라 소재를 발견하고 기다리는 다큐멘터리스트의 위치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덕분에 감독의 위치는 극영화 사상 관객의 위치와 가장 비슷한 상태다. 이것은 또한 주인공들에게 빚진 바가 크다. 좋은 의미에서 소재주의가 적중한 셈이다. 김소희/ 영화평론가 cafe.daum.net/cw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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