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우 맨>을 기억하시는지…. 부드러운 색연필과 파스텔로 눈사람과 소년의 환상적인 모험을 그린, 영국의 대표적인 일러스트레이터이자 동화작가인 레이몬드 브릭스의 대표작. 가슴이 섬뜩해질 정도로 청아한 알레드 존스의 보이소프라노가 인상적이었던 하워드 블레이크의 음악 <하늘을 걸어가며>(Walking in the Air) 역시 한번 들으면 쉽게 잊혀지지 않는 명곡이다. 그래서 눈이 오고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면 이 작품은 어디선가는 한번쯤 보여지거나 들려지는 고정 레퍼토리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레이몬드 브릭스는 1934년 영국 윔블던에서 태어났다. 15살 때 정규 학교를 그만두고 미술학교에 들어가 유화 및 회화 공부를 했을 정도로 그림에 빠져 지냈다. 그의 그림 실력은 워낙 탁월해서 23살 때 옥스퍼드대학으로부터 전래동화의 삽화를 의뢰받았을 정도였다. 그의 동화세계에는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따뜻한 감성이 잘 드러난다. 1967년 <The Mother Good Treasury>와 73년 <Father Christmas>로 연거푸 케이트 그리너웨이상을 수상하며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그리고 78년에 <The Snowman>을, 82년 를 내놓는다.
그가 94년 선보인 동화 <베어>(The Bear)가 얼마 전 국내에서 동화책으로 출판된데 이어, 힐러리 오더스(Hilary Audus)에 의해 98년 만들어진 동명의 애니메이션이 최근 비디오(인피니스 배급, www.infiniss.com)로 출시됐다. 동물원 북극곰의 우리 속으로 곰인형을 떨어뜨려 속상해하는 소녀에게 북극곰이 찾아와 곰인형을 돌려주고 함께 환상여행을 떠난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여러 가지 면에서 <스노우 맨>의 속편이라 불릴 만하다. 우선 <스노우 맨>에서의 주인공 소년과 눈사람은 소녀와 흰 북극곰으로 교체됐다. 눈사람과 북극곰이 주는 거대하고 포근하고 하얀 질감도 비슷하다. 파스텔과 색연필로 일일이 종이에 그려 만드는 페이퍼애니메이션 방식은 이제 레이몬드 브릭스 작품의 브랜드가 된 듯하다(원작자가 브릭스라는 얘기고 애니메이션의 감독은 다르다. <스노우 맨>의 감독은 다이언 잭슨이었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넘나드는 것도 비슷하다. 소녀의 부모가 북극곰에 의해 어질러진 집안과 북극곰의 응가까지 발견하는 장면은 현실인지 환상인지 구분이 어렵게 한다.
소녀가 부모님과 함께 소파에 앉아 <하늘을 걸어가며>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스노우 맨>을 비디오로 시청하는 모습을 북극곰이 지그시 내려다보는 장면은 영국식 유머의 압권이다. 그러고보니 전편 내내 흐르는 부드러운 클래식도 <스노우 맨>의 음악을 작곡한 하워드 블레이크의 작품 아닌가.
그런데 비디오를 보다가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만약 작품이 국내에 만들어져 나왔다면 적잖은 표절시비에 시달리지 않았을까 하는.
우선 거대한 북극곰을 만나 같이 다니는 소녀의 모습이 <이웃집 토토로>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얘기가 나올 테고, 두 번째는 북극곰과 소녀가 만나게 되는, 하늘의 별자리로 이루어진 반투명의 거대한 곰의 모습이 <라이온 킹>에서 보았던 심바 아버지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느냐는 지적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표절시비에 걸렸다는 얘기는 아직 들어본 적이 없다. 아마도 레이몬드 브릭스 특유의 작품관이 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인정받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푹신한 털이 달린 거대한 동물과 하늘을 날아다니기만 하면 무조건 토토로를 본떴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내가 표절 강박관념에 걸려 있기 때문일까.
어쨌거나 다시 거대하고 포근한 것이 그리워지는 계절이 왔다. 그리고 이번에는 <베어>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정형모/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hyu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