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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기 보다 나직하게,<체인징 레인스>
2002-11-26

■ Story

중요한 심리공판을 앞둔 변호사 게빈 베넥(벤 애플렉)과 아이들의 양육권을 잃지 않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던 도일 깁슨(새뮤얼 잭슨)이 자동차 접촉사고로 도로 한복판에서 만나게 된다. 베넥은 급한 마음에 사고를 대충 처리한다. 한편, 깁슨은 이 사고로 법정에 늦게 출두하여 진술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아이들과 헤어지게 된다. 베넥이 사고 현장에 남겨놓고 간 중요한 서류를 갖고 있던 깁슨은 기회를 잃은 것에 앙심을 품는다. 이 서류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협상과 협박의 엇갈림이 시작된다.

■ Review

처음에는 정말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끝날 수도 있었다. 깁슨이 요구하는 대로 베넥이 법정 절차를 밟아가며 접촉사고를 처리했더라면, 무심코 “운 나빴다 쳐요”라고 한마디 뱉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깁슨은 베넥이 남겨놓고 간 서류를 두고 협박을 하려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는 이 두 사람 모두에게 급한 일이 없었더라면 사고는 어떻게 처리되었든 또한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지나갈 수도 있었다. 아니, 차라리 차사고가 없었더라면 두 사람의 인생은 교차함이 없이 평행하게 이어져 갔을 것이다. 하지만 판사의 말을 옮기자면 깁슨에게 오늘은 인생을 결정짓는 중요한 날이다. 그리고 베넥에게는 엄청난 기회를 얻게 될 희망찬 날이기도 하다. 자동차 접촉사고가 아니라면 만날 일이 없어 보이는 이 둘이 만나야 하는 이유는 한마디로 삶의 교훈 때문이다.

<체인징 레인스>는 그 교훈을 들려주기 위해 평이한 사건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점 더 얽혀들어가는 엇갈림의 시도들을 펼쳐놓고, 그리고 다시 전화위복의 드라마를 한순간에 완성시킨다. 이 영화가 들려주는 교훈은 강하기보다 나직하다. 무엇보다도 인물들이 감정적 흥분상태에 빠지기는 하지만 서로에게 어떤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깁슨이 재활의 시간을 잃어버린 앙금 때문에 잠시 협박성 팩스를 보내기는 하지만 그는 이내 서류를 돌려주리라 마음을 고쳐먹는다. 그리고 베넥도 해커를 이용해 깁슨을 신용불량자로 만들어버리기는 하지만, 정말 그가 파산하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갈등이 고조되면서도 살인이 나거나, 피가 튀지 않는 것은 이 둘 모두 그만한 ‘이성’으로 수위를 조정하려고 들기 때문이다. <체인징 레인스>는 시종일관 긴장의 형성을 선과 악의 이분대립에 두지 않고 그 상황에 둔다. 그러므로 문제는 시기인데, 매번 그 복수와 참회의 시기가 엇갈린다. 깁슨이 서류를 돌려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는 순간마다 베넥은 뒤늦게 강제로 그것을 빼앗아올 협박의 전략을 짠다. 그리고는 다시 깁슨은 좀더 강화된 태도의 복수를 실행한다.

그렇다면 <체인징 레인스>는 무엇을 걸고 교훈을 들려주려 하고 있는 것일까 그걸 찾아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체인징 레인스>를 붙들고 있는 것은 바로 ‘신뢰’와 ‘약속’, ‘신용’, ‘믿음’ 등등의 너무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아는 만큼 실행되지는 못하는 것들의 효력이다.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자. 법적 처리를 거쳐 사건을 처리하자는 깁슨의 제안은 법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약속을 다짐받기 위한 것이었다. 굳이 금전적 보상 때문이 아니다. 지금 이 사람에게는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약속을 이행한다는 것이 자기 삶 속에서 중요하다. 알코올중독자로 살아온 그가 아내와 헤어지지 않고 아이들과 함께 살면서 일생을 지내기 위해서는 다시는 술을 먹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켜내야만 하고, 그럴 수 있음을 오늘 하루를 기점으로 확인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법을 어기면 안 되는 사람입니다”라고 깁슨은 말한다. 하지만 도일의 삶 안으로 들어온 베넥은 그 약속을 저버린다. 깁슨의 복수심은 그 약속의 기회를 잃어버린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 깁슨에게 신뢰는 중요한 것이지만, 베넥에겐 그렇지 않다. 법을 지켜야 할 변호사지만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일을 몰래 저지르고 있다.

약속의 의미가 베넥에게 맞춰지면 그것은 신뢰와 믿음의 문제가 된다. 베넥은 깁슨이 서류를 돌려주기까지 기다릴 만큼 신뢰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다. 부정으로 연루되어 있는 사건들을 다루면서도 승소하기 위해서만 살아가고 있는 그에게 신뢰는 이미 의미를 잃어버린 단어이다. 그는 지금 아내 몰래 회사동료와 사귀고 있으며,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내는 현실의 안락을 위해 눈감아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회사의 사장인 장인은 더 큰 부정을 저지르도록 베넥을 부추긴다. 그 틈바구니 속에서 신뢰와 믿음의 의미를 되찾기 위해서는 오히려 낯선 깁슨이 필요하다. 역설적으로, 깁슨을 협박하는 베넥의 시행착오적 과정이 꼭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결국 그에게는 혜안의 지름길을 내주게 될 테니까. 베넥이 깁슨을 혼내주기 위해 깡패를 동원하거나 하는 물리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결정적이다. 그가 선택한 방식은 해커를 이용해 깁슨의 신용도를 파산상태로 몰고가는 것이다. 신용을 볼모로 삼는다는 것은 깁슨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힐 수 있다. 사회 속에서 깁슨에게 거듭 중요한 것은 약속, 그러니까 신용인 셈이니까. 그리고 깁슨과 베넥이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치유의 지점 역시 이 신용의 회복으로 상연되고 있다.

♣ 사소한 접촉사고를 성의껏 처리하지 않아 생긴 베넥과 깁슨의 충돌은 서로의 삶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다. 소송관련 서류를 잃어버린 베넥과 재판에 늦어 아이들과 만나지 못하게 된 깁슨, 둘은 서로의 삶을 할퀴며 얽혀든다.

거꾸로 생각해서 협박들은 이 둘이 결국 화해하게 될 것이라고 믿게 하는 할리우드영화의 약속 안에서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체인징 레인스>가 자극적인 스릴이 되지 않는 것은 모두가 행복의 언덕이 근처에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 닿기 위해 중요한 것은 자극이 아니라 양심이다. 이 영화는 차라리 그 재미가 시시하게 느껴진다고 생각되는 곳에 의미를 두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영화의 장점일 것이다. <노팅 힐>의 감독 로저 미첼이 <체인징 레인스>에 적용한 전략은 부풀려지는 갈등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 두 인물 모두가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게 되도록 배치해놓은 약속에 있다. <체인징 레인스>에서는 갈등도, 협박도, 오해도, 모두 회복의 의미 안에 있다.정사헌/ 영화평론가 taogi@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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