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걸>. 낯선 신인가수의 이름이거나 지기 스타더스트 같은 가상인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제목은 사실 강산에의 새 음반 타이틀이다. 92년 데뷔 이래 강산에로 알려졌던 그가, 생뚱맞게 본명선언()을 내건 음반을 들고 돌아왔다. 라이브 음반, 베스트 음반으로 틈틈이 목소리를 듣긴 했지만 정규 음반은 4년 만이다. 지난달 호적상의 본명을 딴 7집을 선보인 그는, ‘지가 강영걸이라예’란 제목으로 라이브 공연도 성황리에 마쳤다.
그런데 왜 새삼스럽게 본명선언일까. 강산에가 예명이 아니라고 했던 그의 말을 기억한다면, 더 의아해 할지도 모르겠다. 강산에란 이름은 그가 경희대 한의대에 다니던 시절, 친구가 지어줬다고. 어렸을 때 남자애라고 할머니에게 “사내”라 불리곤 했다는 그는 발음이 비슷한 우연을 재밌어하며, 대학 때부터 쭉 ‘강산에’를 본명으로 써왔다. “예전엔 안 그랬는데, 이젠 강영걸이란 어감이 정겹게 느껴졌다. 사진으로 얼굴만 봤을 뿐이지만 아버지한테 받은 거라곤 몸 외엔 이름뿐이니까.” 가장 힘들거나 가장 기쁠 때마다 이름 외에 아무런 기억이 없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힘겨워했었지만, 오랜 휴식 동안 자신의 걸음을 돌아보면서 결국 그 상실감도, 음악도 자신이 살아온 기록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강영걸>은, 더욱 솔직하게 그 자신으로 돌아가는 또 하나의 시작인 셈이다.
이번 음반을 듣거나 공연을 보면, 그 솔직함의 의미가 더 분명해진다. 물론 강산에를 세상에 알린 <…라구요>부터 그의 노래는 늘 그의 삶에서 건져올린 것이었지만, <강영걸>에 이르러서는 내용뿐 아니라 형식에서도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을 만큼 무르익은 듯하다. 먼저 눈에 띄는 곡 중 하나인 <와그라노>가 대표적. 남미풍의 세련된 선율에 “와그라노 니 와그라노” 하는 경상도 사투리의 어감을 십분활용한 이 곡은, 굳이 메시지를 내세우지 않지만 사투리에 대한 고정관념을 흔들어놓는 발랄한 시도다. 서울 출신이 아닌 대부분이 그렇듯 부산 출신인 그도 처음 서울에 왔을 때 말의 이질감에 곤혹스러워한 경험이 있다고. 말투를 바꾸긴 했지만 서울말이 표준이라는 규격화에 짜증스러웠던 기억을, 경쾌한 음악으로 풀어냈다. 같이 음악을 하는 후배들도 “경상도 아들”이 많아지면서 어느새 사투리로 돌아간 그의 말투도, 더 솔직하고 편한 느낌이다.
함경도 사투리로 능청맞게 '명태'의 유래를 래핑하는 <명태>도 마찬가지. "어차피 주로 외국 문화를 수용하는 입장이긴 하지만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집착 같은 게 있다"는 그는, "고유한 액센트가 있는 함경도말"에서 흑인들의 그루브와 다른 낯선 리듬의 가능성을 발견해냈다. <영걸이의 꿈>처럼 꿈에 대한 진솔한 가사, 포크와 록을 넘나드는 강산에 특유의 음악이 있는가 하면, 끝없는 모래와 태양 사이에서 "지지고 볶고 사는" 일상의 피로를 훌훌 벗어던질 수 있었던 느낌을 살린 <Sun Tribe>처럼 남미 혹은 아프리카 등 민속음악의 요소를 살린 곡, "어쩌면 내가 한 이해도/ 착각의 오해는 아닐까 아닐까"하고 소통의 어려움을 보사노바풍의 선율에 담은 <이해와 오해 사이> 등 기존 음악과 또다른 질감의 실험들은 장르의 구분을 떠나 한층 자유로워진 모습이다. 그를 세상에 알린 <...라구요>부터 그의 음악은 늘 삶의 체취를 담고 있었지만, <강영걸>에 이르러서는 내용은 물론 형식에 있어서도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을 만큼 무르익은 성숙함이 엿보인다. 황혜림 blauex@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