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돌을 맞은 부산국제영화제엔 티에리 프레모 칸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디이터 코슬릭 베를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모리츠 드 하델른 베니스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등 이른바 ‘3대 영화제’의 수뇌들이 모두 찾아와, 부산이 명실공히 ‘아시아 영화의 창’으로 자리잡았음을 입증했다. 세 위원장은 아시아 영화를 사냥하러 부산에 왔다고 밝히며, 한국영화가 세계영화를 대표하는 새로운 흐름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호평까지 내놓았다. 이들은 또 젊은 감독들의 프로젝트를 제작자와 연결짓는 창구인 부산 프로모션 플랜(PPP)이 훌륭한 제도라고 입을 모았다. 세계 영화계 최고의 권력자들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이 세 위원장들에게 한국과 아시아영화, 최근 세계 영화계의 흐름 등에 관해 들어보았다. /편집자 ◆티에리 프레모(칸 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정치적 현안 담아내되 상업영화 배격 말아야
지난해에 이어 올해 두 번째 부산을 찾은 티에리 프레모 칸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을 18일 부산 해운대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만났다. 그는 “지난해엔 김동호 위원장의 초청에 응답하는 차원”이었지만 올해는 “기대를 갖고 즐거운 마음으로 뭔가 배우겠다는 생각으로 왔다”고 말했다. 부산 이외에 비유럽 지역에서 열리는 다른 영화제에도 가보았는가? = 베를린, 베니스 이외에는 미국 콜로라도 영화제 한 곳만 다녀왔다. 영화제 대신 많은 여행을 통해 영화인들과 인간관계를 맺고 어떤 영화들이 만들어지고 있는지를 이해한다. 부산의 경우 부산 프로모션 플랜(PPP)은 앞으로 2∼3년 안에 만들어질 아시아 영화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중요한 창구다. 올해 칸에서는 공식 상영작 55편을 고르기 위해 모두 2281편의 영화를 검토했다고 발표했다. 그 많은 영화들을 어떻게 거르는가? = 각 지역 통신원들이 먼저 필터링을 한다. 새해 1월부터 4월까지는 업무량이 폭주한다. 선정위원회의 규모와 운영 방식은 굉장한 일급비밀이다. (웃음) 외국영화위원회와 프랑스영화위원회 두 가지가 있다는 것만 얘기해주겠다. 나도 이 직을 맡기 전엔 도대체 어떻게 선정하는 건지 매우 궁금했다. 그러나 안에 들어와 보니 비밀로 하는 이유가 있음을 깨달았다. 영화제의 무슨 위원회가 앞으로 나서는 게 아니라, 작품들로 영화제가 보여지기 위해서 막후의 과정은 비밀로 남겨두는 것이다. 유럽영화와 아시아영화의 차이가 있다면? = 영화는 발명 초기부터 세계적인 것이었다. 초기 영화인들은 베트남, 멕시코, 미국 등 세계의 이미지를 영상에 담았다. 한때 할리우드가 영화의 모델을 제공했지만, 이젠 한가지 규범에 매이지 않고 시선이 확장됐다. 가령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도 프랑스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데, 프랑스에서는 이제 아시아 영화를 뭔가 어렵고 낯선 걸로 여기지 않는다. 한국 영화산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 영화산업엔 일종의 사이클이 있다. 한국영화는 지금 매우 풍부하고 좋은 사이클에 올라 있다. 어떤 영화를 선택하고 다른 걸 버려선 안 된다. 가령 작가영화를 선택하고 상업영화를 배격한다는 방식은 옳지 않다. 프랑스에선 60년대 말 상업영화들이 크게 성공했다. 이런 상업영화의 인기가 오히려 누벨 바그를 보호했다. 정치적으로 예민한 사안을 다룬 영화의 경우 의견이 충돌할 수 있다. 그런 문제에 대해선 어떻게 처리하는가? = 올해 칸은 상당히 정치적인 이슈가 많았다.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도 그랬고. 그것은 올해의 세계가 굉장히 정치적이었고, 영화가 그걸 반영했으며, 칸 또한 그것을 반영했을 뿐이다. 부산/글·사진 이상수 기자 leess@hani.co.kr ◆디터 코슬릭 (베를린 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현실 비켜가면 무의미, 할리우드도 존재 이유 디이터 코슬릭 베를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취임하자마자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데 이어 올해도 4명의 관계자들과 함께 찾아왔다. 24년 동안 베를린 영화제를 맡아온 모리츠 드 하델른에 이어 올해부터 베를린 영화제를 진두지휘한 그는 취임초기부터 ‘혁신’을 내걸고 베를린 영화제에 젊은 숨결을 불어넣었던 인물. 15일 해운대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만났다. 부산영화제를 두 번째 찾은 소감은? = 부산은 한국영화, 아시아영화를 볼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장소다. 개인적으론 지난해 처음 만나고 이내 ‘친구’가 된 김동호 위원장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프랑스 사람보다 매력적인 사람이다.(웃음) 부산영화제의 특징이나 장점은? = 영화제는 패션쇼와 같은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2~3년 뒤 미래의 트렌드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부산 프로모션 플랜(PPP)처럼 아시아의 주요 프로젝트들이 모여드는 부산이 바로 그런 모습이다. 취임하면서 ‘혁신’을 내걸었는데, 올 초 처음 치른 영화제를 자평해달라. = 경쟁부문에 신인감독의 데뷔작을 2편 초청했다. 추운 날씨에도 베를린에는 길거리에서 맥주를 마시고 밤늦게까지 왁자지껄한 모습이었다. 부산의 남포동처럼 말이다. 이런 개방적 모습이 우리의 성과다. 특히 내년 2월엔 영화제 기간에 맞춰 ‘베를리날레 탤런트 캠퍼스’가 열린다. 전세계에서 500명 이상의 신인과 영화학과 학생 등 초심자들이 선배 영화인들과 만나 영화계 최신 동향을 접하도록 하기 위한 행사다. 500명의 1분 짜리 작품을 모두 상영할 이 자리는 ‘혁신된 베를린’의 모습이다.올 초 ‘다양성을 인정하라’는 슬로건과 함께 정치영화들을 대거 초청했는데? = 나는 1968년 이후 좌파 세대다. 언젠가 히틀러의 옛 사무실이 내 사무실에서 8백m 거리란 사실을 알고 소름이 돋았다. 독일의 아픈 과거를 들추는 건 괴롭지만, 과거를 직시해야 발전할 수 있다. 앞으로도 이런 추세를 유지할 것인가? = 그렇다. 내년의 주제는 ‘톨레랑스를 향하여’다. 영화가 정치 사회적 맥락을 반영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물론 정치적 이슈라는 게 내 세대처럼 좌냐 우냐의 문제는 아니다. 세계화 시대에는 다양한 정치적 이슈가 등장했다. 가령 복제문제 따위도 그런 예라 할 수 있다. 당신의 취임 전까지 베를린 영화제는 몇 년 동안 할리우드를 편애했다는 비판을 들었다. = 거꾸로 내가 할리우드를 배제하는 건 아니다. 영화제엔 스타가 필요하다. 반면 자국의 최고 영화를 보여주는 것도 필요하다. 난 몹시 진지한 사람이지만 하루에 50%는 웃으며 살고 싶다. 정치적 이슈를 택한다고 오락 영화를 배제하는 건 아니다. 물론 쓰레기 같은 영화는 논외다. 이 둘은 모순적인 게 아니라 엔터테인먼트의 양날개가 돼야 한다. 부산/글·사진 김영희 기자 dora@hani.co.kr ◆모리츠 드 하델른(베니스 영화제) 새것 발견은 아름다운 일, 한국영화 최전선 떠올라 베를린국제영화제를 24년 동안 이끌다 올해부터 베니스국제영화제를 이끌고 있는 모리츠 드 하델른 집행위원장은 올해 처음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다. 골초로 소문난 그는 줄담배를 펴가며 “한국영화를 고르기 위해 부산에 왔다”고 공언했다. 한국엔 처음인가? = 부산국제영화제가 만들어지기 전인 90년대 초 서울에 서너 번 왔다. 그때 누군가 내게 부산영화제를 만들려고 한다며 의견을 물었다. 난 ‘좋은 생각이 아니다. 홍콩, 도쿄, 대만, 상하이 영화제가 있는데 되겠는가’라고 했다. 그 분이 내 말을 듣지 않고 영화제를 만들어서 너무도 다행이다. 부산은 이제 한국의 영화제일뿐 아니라 모든 아시아 영화인들의 축제다. 올해는 한국영화만 집중적으로 볼 계획이다. 부산에 이어 상하이와 홍콩을 따로 방문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오아시스>가 성공한 것 때문에 부담스럽다. 그보다 더 좋은 한국영화를 찾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부산영화제에서 특히 사줄 만한 부분은? = 부산 프로모션 플랜(PPP)은 매우 좋은 제도다. 난 여기랑 상관없지만 피피피에 온 감독들이 다 돈을 많이 받아갔으면 좋겠다. 이런 창구가 없으면 젊은 감독들 돈줄 잡기가 힘들다. 그동안 아시아영화를 어떤 시각에서 골라왔나? = 발견은 가장 아름다운 일이다. 유럽인들이 자기 시각에서 아시아 영화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고 말하는 건 매우 위험하고 좋지 않은 거다. 다른 문화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필요하다. 아시아 영화에 대한 유럽의 반응은 어떤가? = 영화제의 수상이나 비평가들의 찬사가 흥행성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와호장룡>이 이탈리아에서 80만명의 관객을 모았는데, 다른 영화들은 보통 2만∼3만을 넘기지 못했다. 이런 사정은 독일이나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영화제의 임무가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현재 세계 영화의 최전선엔 어떤 영화들이 있다고 생각하나? = 영화계의 최전선엔 미국의 침략이 있다. (웃음) 영화사를 보면 다양한 경향의 영화들이 부침했다. 가령 프랑스의 누벨 바그에 이어 독일의 뉴 저먼 시네마가 등장했다가 홍콩과 중국의 영화들이 그 뒤를 이었고 오늘날은 그게 한국영화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얼마나 갈지는 모르지만…. 올해 베니스에서 <막달레나 시스터즈>가 바티칸의 항의를 받았다.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 바티칸은 바티칸의 의견이 있고 나는 내 의견이 있을 뿐이다. 내가 신부가 아니지 않은가. 정치적 혹은 종교적으로 예민한 사안이 담긴 영화를 초청할 때 어떤 원칙이나 고려사항이 있는가? = 전혀 없다. 어떤 금기도 믿지 않으며 어떤 형태의 검열에도 반대한다. 영화만 좋으면 무조건 튼다. 부산/글·사진 이상수 기자 lees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