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 : 영화를 볼 예정인 분들과 영화를 보고 엄청 감동받은 분들은 절대 읽지 마십시오. 전자에게는 스포일러가, 후자에게는 “홀딱 깨는 불상사”가 우려됩니다.
빙의를 소재로 한 두개의 영화, <비밀>과 <중독>이 개봉되었다. 두 영화에서 빙의가 다루어지는 방식은 상반된다. <비밀>에서는 실제 빙의가 일어났으나, 신체적/정신적/사회적 정체성이 상충되어, 관계가 혼란스러워지자 주인공은 자신과 남편을 위해 빙의가 원상 회복된 양 위장하고 몸의 정체성을 따라 새롭게 산다. <중독>은 실제 빙의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일종의 ‘빙의-히스테리’인데, 신체적/사회적 정체성은 무시되고, 오로지 정신의 정체성에 따라 몸이 바뀐 채로 살며, 사실이 밝혀져도 그대로 받아들여진다. 또 두 영화 모두 사랑을 말하는데, <비밀>은 “사랑하기에 비밀입니다”라고 하고, <중독>은 “미치도록 그리웠고, 죽을 만큼 사랑했다”고 한다. 전자의 사랑은 배려이고, 후자의 사랑은 주장이다. 후자의 사랑을 영화는 “미친” 사랑이라 칭하는데, 단, 여기서의 “미침”은 대상 선정이 잘못되었다거나, 지나치게 강렬하다는 뜻이 아니라 순전히 ‘방식이 미쳤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 같다. 그들의 사랑은 말 그대로 ‘히스테리적 사랑’이다. 과연 그런가
‘나는 나’라고 생각하는 ‘나’는 누구인가
데카르트는 의심을 거듭하다 “이렇게 의심하는 내가 바로 나”라고 고민을 덮는다. 그에게는 ‘의심하는 그의 정신’이 ‘그’였다. 그의 정신이 다른 몸 속에 들어가 계속 고민한다면 ‘아까 했던 의심을 계속하고 있는 나’가 존재하며, 따라서 ‘계속 나’이다. 그에게 몸은 단지 정신이 운전하는 기계이다. 이처럼 ‘정신/신체 이원론’이 가장 극적으로 개진된 현상이 빙의이다. 정신이 다른 몸에 깃든다니 정신과 몸은 서로 다른 것이어서 분리될 수 있으며, 그 결합이 필연적인 것도 아니어서 서로 교환될 수 있다는 뜻이다.
<블레이드 러너>였던가…. 사이보그가 “감정은 몸이 있으면 저절로 생기는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실제로 몸은 감정을 만들어내기도 하고(생리 전 우울증), 꿈을 만들어내기도 하며(몽정), 기억을 내장하기도 한다(기억상실증 환자에게 보존되는 자전거 타는 기술). 그뿐인가 현대 철학자들이 주지하듯, 몸은 권력이 관통하는 지점이요, 자본이 발화하는 토대이자, 문화가 체현되는 공간이다. 어찌됐든 사회적 관계 속에서 우리의 주체는 몸을 기반으로 구성된다. 우리의 성, 나이, 인종, 건강상태, 용모 등 몸에 속한 여러 속성들은 우리를 사회적으로 규정하고 제약한다. 몸은 자아 정체성의 근원이다. 즉 ‘내 몸’이야말로 ‘나’인 것이다. 내 몸이 내가 아닐 수 있다거나, 나의 표피적인 일면을 구성할 뿐이라거나, 단지 의지에 속해 있다고 믿는 이들에게 변비나 발기부전을! 관념론자는 냉엄한 현실에 의해 처절한 응징을 맛본다.
영구 없다 빙의-히스테리
이병헌은 마치 빙의가 일어난 양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속인다. 프로이트 말씀에 “히스테리 환자는 마치 해부학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다”고, 빙의-히스테리 환자인 그는 몸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는 자신의 몸에 딸린 사회적 관계를 통째로 버리고, 형의 몸에 딸린 사회적 관계를 그대로 받고 싶어한다. 그 관계에 이미연과의 부부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그는 이미연과의 사랑을 위해서는 형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을까 형도 이미 없는 상황에서 왜 대진으로서는 그녀를 절대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시동생이라서 그 금기는 누구에 의해 받아들여진 생각인가 그는 그 금기가 사회에 널리 유포된 생각이며, 그보다 이미연도 반드시 그렇게 생각하리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빙의-히스테리와는 무관하게, 사회적으로 그는 이미 형수와 같이 사는 시동생이 되었으며, 이미연은 몸의 정체성이 시동생인 그를 받아들임으로써, 사회적으로는 이미 시동생과 붙어먹는 형수가 되는 것을 감수해야만 하는 상태였다. 철저하게 몸의 정체성을 따르는 법적인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하다 못해 동네 슈퍼 아줌마도 ‘저 여자는 이제 시동생이랑 사네…’ 하면서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거나 말거나 했을 문제이다. 더욱이 막판에는 정신도 시동생인 그를 그녀는 알면서도 받아들이는데, 그렇다면 ‘난 시동생이라서 절대 안 돼… 그녀를 사랑할 수 있는 건 형뿐이야… 그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저 유일무이한 형의 자리로 들어가야 해…’라는 그의 금기 강박은 기실 엄격한 사회통념을 고려한 것도 아니고, 고매한 형수의 도덕을 대변한 것도 아니요, 이병헌 자신만의 자가당착적 망상인 셈이다.
이를테면 자신이 시동생으로서 형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죽어도 인정하기 싫어서, 자기가 그냥 형이라고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인데, 더욱 기가 찬 것은 그가 이 유치한 사랑법을 ‘자신조차 버린 대단한 사랑’이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영구 없~다~ 형수를 사랑한 대진이 없~다~ 를 외치며 형의 자리에 쏙 들어가 앉은 그에게 무슨 말을 하랴 “야야 다 보여… 그냥 나와!” 그는 대진으로서 그녀를 사랑한다는 힘겨운 진실을 고백하고, 그녀와 새롭게 사랑하며, 그녀와 함께 ‘시동생과 형수의 사랑’으로 세상과 맞장떠볼 용기가 없는 것이다. 그의 사랑은 ‘미친’ 사랑이 아니라 한심하고 안일하며 비겁한 사랑이다.
그는 그녀를 언제까지나 옛사랑 형의 옆에 묶어두고, 자기가 형이 되어 그녀를 계속 사랑해주겠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그녀는 ‘가을 햇살에 강렬한 인상으로 박힌 사진 속의 그녀… 그러나 이미 형의 여자인 그녀’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며,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녀는 그의 카메라에, 금기 강박에, ‘미친’ 사랑에 포박된 존재여야만 한다. 그는 형의 아내를 욕망하는 자신을 죽여버리고 싶은 미친놈이자, 자기를 포함하여 형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는 형수를 죽여버리고 싶은 미친놈이기도 하다. 편집증적 욕망과 화해할 수 없는 금기의 벽 속에 갇혀 자기모순의 결과물로 빙의-히스테리를 앓는 이 유치한 사랑은 결국 자기를 죽이고, 형수를 옭아맨다. 그런데 더욱 가관인 것은 형수이다.성관계는 없다 불감-히스테리
그녀는 시동생인 그를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었나 의사의 진단은 정확했다. “사고 뒤 우울증 또는 히스테리 증상으로… 빙의가 일어난 것으로 믿고…” 그런데 그가 형이고 싶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그의 모습에서 형의 모습을 찾고”싶고, 살아 돌아온 그가 형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자기 암시적이라 돌아가신 아버지를 느끼며 살고, 남편도 아버지가 보내주었다고 생각하고, 자기 말 때문에 돔이 안 열렸다고 생각한다. 얼마든지 복제가 가능한 조잡한 목걸이를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으로 믿으면 그만이고, 얼마든지 도용이 가능한 시시콜콜한 연애사를 “어떻게 사랑했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대단하게 믿으면 그만이다. 그녀는 단편적인 기억을 맞춰보고 “그 사람 호진씨 맞아요”라고 선언한다. 그녀에게 사람의 정체성이란 고작 기억 쪼가리에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토탈 리콜> <메멘토> <공각기동대> 등 무수한 영화에서 기억 따위는 얼마든지 외삽, 조작이 가능하며, 존재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녀가 사랑은 단지 정신의 교류이며, 정신은 기억에 의해 증명된다고 믿는 딱한 관념론자가 아니었다면, 소포 이전에 자력으로 눈치챌 기회가 충분히 있었다. 결정적으로 섹스가 그것이었으나 그녀는 청맹과니이다. 왜 영화는 그들의 정사장면을 지루하게 보여주었으나, 그 과정에서 그들은 대화도 갈등도 없다. 어이없게도 그녀에게 섹스란 하기로 마음먹기가 어렵지, 일단 하기로 했으면 ‘그냥 하는’ 종결점일 뿐이다. 그가 어디를 만지고, 어떻게 안는지 그녀는 무감각하단 말인가 섹스는 단순한 육체의 결합이라 더이상 성찰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단 말인가 그녀에게 섹스는 몸으로 행하는 정교한 대화이자, 상대의 내면을 느끼는 농밀한 과정이 아니라, 그저 눈 딱 감고 몸을 섞는 단순공정에 불과하다. 그녀의 이러한 태도는 흡사 남자를 유혹하는 것까지가 목표이지 정작 섹스에는 불감증인 히스테리성 인격장애 여성을 생각나게 한다.
그녀들은 오로지 사랑받는 것이 목표일 뿐, 지속적이고 성숙한 애정관계를 맺어나가지 못한다. 그녀 역시 오로지 사랑받고 싶은 존재로서의 자아 정체성이 있을 뿐, 새로운 삶을 살아 가야 할 미망인이자, 똘아이 이병헌의 형수라는 사회적 정체성이 없다(몽상적인 그녀를 현실적인 생활인이었던 ‘똘아이 종두의 형수’와 비교해보라). 그녀가 성숙한 인간이라면 빙의-히스테리를 앓는 이병헌에게 그의 모순을 깨닫게 하여 자신의 삶을 살도록 하고, 그녀도 변화된 자신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남자의 사랑을 받지 않고서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존재라서(그녀야말로 이성애 “중독”이다.) 그냥 시동생을- 그게 누구이든! - 받아들인다. 그녀는 고민할 것도 없다. ‘지가 알아서 계속 형이라고 우기네, 나는 계속 형이라고 믿으면 되는 거네, 나는 계속 그의 여자로 사랑받네…’ 하고 스스로를 정당화시키며 도넛을 날름 받아먹으면 된다. 그녀는 모르는 척 연기하는데(은수의 연기는 대진을 능가한다) 그녀로서는 손해보지 않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형의 사회적, 정신적 측면을 그대로 승계한데다, 신체적 측면은 형보다 나으니 까짓 뭐가 문제랴
속보이는 히스테리 블루스!
<중독>에서 막상 빙의는 없다. 그러나 실제 빙의가 일어난 <비밀>보다 훨씬 관념적이다. 사회적, 신체적 맥락은 온데간데없고, 오로지 정신, 의지, 그렇다고 믿는 것 따위가 훨씬 중요하다. <중독>의 사랑은 지독한 사랑이 아니라, 고착되고 변화하지 않는 유치한 인격체들의 사랑이다. 빙의-히스테리 대 불감-히스테리. 속이는 놈과 속아주는 체하는 년의 속보이는 히스테리 블루스! 그 와중에 그나마 실리를 챙긴 건 그녀이다. 영구 없다~ 며 까고 있는 이병헌은 “사랑밖에 난 모르는” 그녀에게 ‘괜찮은 사회적/정신적 존재인 형이라는 도넛 위에 덧발린 더 좋은 육체라는 슈크림’일 뿐이다. 이병헌은 그녀의 한입(!) 가득한 행복이다.황진미/ 영화 칼럼니스트 chingmee@freech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