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카메라를 이용하기 시작한 뒤로는, 일반 사진기로 사진을 찍어 사진관에서 인화되기를 기다리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조그마한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다니다가 아무런 부담없이 찍은 뒤 CD에 저장하거나 그냥 지워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액자에 넣거나 누구에서 선물하고 싶어서 반드시 출력을 해야 할 경우도, 집에 있는 포터 프린터면 충분하다. 상황이 그러하니 옛날처럼 사진 한장한장을 정성스럽게 앨범에 붙이는 일 따위는 할 기회가 없어졌고, 당연히 앨범을 들춰보는 일도 없어졌다. 이사 준비를 하다가 처박혀 있던 앨범을 발견하고는, 잠시 옛 생각에 잠기는 것이 고작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 옛 앨범 속에서 의외의 사진을 찾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96년 안시 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내가 <월레스와 그로밋>, <치킨 런>의 감독인 닉 파크와 찍은 사진이 그런 경우였다.
내가 함께 사진을 찍은 사람들 중에서 전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닉 파크는, 당시만 해도 애니메이션계에서만 유명한 사람이었다. <월레스와 그로밋>이 미국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긴 했지만, 그의 존재는 그저 영국에서 특이한 애니메이션 작업을 하는 재능있는 감독 정도였던 것. 나와 같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과 몇장의 사진을 찍을 정도의 여유가 있었던 것도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스필버그와 손을 잡고 난 이후엔 세계영화계·애니메이션계에서 거물급 인사가 되었다. <치킨 런>의 성공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따라서 전세계의 이목은 이제 그의 차기작품에 쏠려 있는 중이다. <토끼와 거북이>를 클레이메이션으로 만든다는 소식도 한동안 들렸고, 그에게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상을 안겨준 <동물원 인터뷰>(Creatures Comport)의 새로운 에피소드 제작소식도 들렸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팬들과 언론에 기대를 안겼던 것은 그의 대표적인 캐릭터들인 월레스와 그로밋이 등장하는 장편클레이메이션의 제작 소식이었다.그런데 2004년 개봉을 목표로 제작되고 있는 <월레스와 그로밋> 장편(Wallace and Gromit: The Great Vegetable Plot)을 목빠지게 고대하던 이들에게, 얼마 전 닉 파크가 예상치 못했던 큰 선물을 선사해 화제가 되었다. 그 선물이란 월레스와 그로밋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 시리즈인 (끝내주는 발명품쯤으로 해석 가능)를 선보인 것. 약 2분 내외의 초단편 10편으로 구성되어 있는 은 지난 95년 <월레스와 그로밋>의 세 번째 에피소드인 이후 약 7년 만에 발표된 것. 주목할 만한 것은 인터넷을 통한 영상물 배급이 확산되고 있는 시점을 맞아, 인터넷에 적합한 2분 내외로 각 에피소드를 구성해 이를 인터넷을 통해 공개했다는 사실이다. 그 방법도 독특해서 지난 10월15일 0시1분을 기해 닉 파크와 아드만스튜디오의 든든한 후원자인 의 온라인 사이트에 그 첫 번째 에피소드인 을 다운받거나 스트리밍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온라인을 통해 무료로 공개한 것은 전체 10개 에피소드 중 하나뿐이고, 나머지 9개 에피소드는 유료화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온라인 사이트에 처음 공개를 한 지 24시간 뒤에 온라인 영화사이트인 Atomfilms.com에 전제 에피소드를 모두 올려놓은 것. 각 에피소드의 파일을 다운받거나 아니면 스트리밍 비디오를 통해 보기 위해서는 Atomfilms.com에 9.95달러를 지불하도록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을 통해, 그것도 유료로 월레스와 그로밋을 만나는 것에 거부감이 있는 팬들을 위해서, 비디오와 DVD를 출시하는 기민함도 잊지 않았다. 약 20분 분량밖에 안 되는 본편 에피소드들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낄 것을 우려해, 각종 인터뷰들과 <월레스와 그로밋> 주연의 게임 데모, 제작과정 다큐멘터리 등을 포함시켜 출시를 한 것이다. 그리고 <월레스와 그로밋>의 광적인 팬들이 많은 일본에서는 DVD 출시는 물론 올 연말 극장 개봉도 예정되어 있는 중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새로운 에피소드들이 닉 파크와 아드만스튜디오만의 독측한 유머들로 가득 차 있어, 팬들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다는 사실이다. 언제나 황당한 기계장치들(예를 들어 무시무시한 전자바지나 달로 가는 우주선)을 만들어왔던 월레스가 더 황당한 발명품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이번에 선보인 <Cracking Contraptions> 내용이다. 중요한 것은 그 발명품의 황당함도 황당함이지만, 항상 충직한 우리의 그로밋에게 그 발명품을 제일 먼저 시험해본다는 사실. 예를 들어 <The Soccamatic>의 경우, 엄청난 속도로 슈팅을 하는 기계를 만들어 골키퍼인 그로밋을 골탕 먹이는 내용이다. 물론 결말부분에 그로밋에 의한 통쾌한 반전이 일어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런 식으로 <The Autochef>에서는 다기능 아침식사 조리로봇이, <A Christmas Cardomatic>에서는 크리스마스카드 제조 기계가 <The Tellyscope>에서는 상상을 뛰어넘는 TV 리모컨이 등장해 보는 이들의 배꼽을 뺏어간다.
이렇게 새로운 초단편 시리즈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2004년에 선보일 장편 <월레스와 그로밋>의 흥행전선에는 파란불이 켜진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닉 파크와 아드만이 월레스와 그로밋에 대해 가지고 있는 애정과 열정이 아직도 식지 않았고, 전세계의 팬들이 아직도 그런 그들에게 무한한 신뢰를 가지고 있음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이철민/ 인터넷 칼럼니스트 chulmin@hipop.com
<월레스와 그로밋> 공식 홈페이지 : http://www.wallaceandgromit.com
AtomFilms <월레스와 그로밋> 페이지 : http://atomfilms.shockwave.com/af/spotlights/wallacegromit
BBC <월레스와 그로밋> 페이지 : : http://news.bbc.co.uk/1/shared/spl/hi/entertainment/02/wallace_and_gromit/front_page/html/default.s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