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윙어즈> <Go> 등 신선하고 생동감 넘치는 두편의 인디영화를 내놓은 바 있는 감독 덕 라이먼은 새로이 큰 걸음을 떼어, 로버트 루들럼의 80년대 첩보스릴러 <본 아이덴티티>를 각색해 진부한 대규모 예산의 영화로 만들어냈다. 맷 데이먼은 기억을 상실한 비밀요원으로서 여러 가지 다양한 신분으로 활동해왔으며 그의 몸 속에는 스위스은행 계좌번호와 함께, 일단 발동하면 도저히 멈출 길 없는 코만도 스타일의 킬링머신으로 순식간에 돌변해 살상을 저지르도록 훈련된 가공할 근성이 박혀 있다. <본 아이덴티티>는 갑작스레 폭발하는 공격성에 대해서도 비슷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라이먼은 컴퓨터그래픽에 대한 고지식할 정도의 열광을 과시하는 한편, 조명을 계속 깜박거리게 만들고, 동적인 클로즈업들을 구사하며 박력있는 편집과 강렬한 컬러를 사용한다. 남의 불행을 고소하게 여기는 듯한 몇 가지 사소한 장면은 파리를 간단히 돌파해버리려는 미국 군사행동식의 접근방법과, 스피드질주하는 자동차들의 스펙터클에서 파생한 것일 게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문제는, 데이먼- 그는 프랭카 포텐트의 매력적인 도주에 한팀을 이룬다- 이 일단 그의 기억이 돌아온 뒤에도 그의 상냥한 인간성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인가 여부다.
조지 W. 부시가 영화의 “대륙간”(Intercotinental) 음모라고 부를 만한 것 한가운데에, 눈 튀어나온 아프리카 정치인(아드왈레 아키누오예-아그바제)과, 어느 대목에선가 “감시원”을 불어로 뭐라고 하는지 알아야겠다고 덤벼댄(‘르’ 감시원이다, 바보들아) 얼굴 찌푸린 CIA 요원(크리스 쿠퍼)이 있다. 영화는 전반적인 과잉으로 넘실거리는데 여기에 또 추가되는 게 줄리아 스타일스다. 인디 스타인 그녀는 숫기없는, “아무것도 안 하고 아무도 안 만나는” 카메오로 출연해 괜히 어슬렁거린다. 고작 파리까지 태워준 값으로 데이먼은 포텐트에게 3만달러를 지불한다. 그렇다면 스타일스는 물론 더 많이 받았을 것이다.
카린 쿠사마의 <걸파이트>는 패잔병들의 파티를 통해 십대 운동선수의 진정한 투지를 그린다. 그리고 이를 통해, <터부>가 그랬던 것 비슷하게, 섹스와 폭력에 관한 개념 여러 가지를 승화시킨다. 이 널리 알려진 영화는 누구나 영화제 수상작으로 밀고 싶을 만한 작품이다. <걸파이트>는 대단히 기민하여 자기 스스로의 포부에 대해서도 거울을 들이댈 수 있는 영화인 것이다. 선댄스에서 수상한 바 있는 이 감독과 또 상받아 마땅한 대발견 미셸 로드리게즈는, 스스로 만들어낸 아마추어 복서 이미지 속에 스며들어간다.
다이아나(로드리게즈)는 늘 찌푸리고 있는 상처투성이 브루클린 여고생으로서 강인한 소녀이지만 성적인 의미에서 여성스런 소녀는 아니다. 거만하고 거친 아버지 명령으로 동생 수강료를 대신 갖다주러 권투도장에 들른 그녀는 거기서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게 된다(동생 타이니(레이 산티아고)는 스스로를 지킬 호신술을 배우라며 억지로 권투도장으로 보내진 상태다). 다이아나는 아버지에게서 훔친 돈으로 수강료를 내며, 이해심 깊은 전직 권투선수(제이미 티렐리)에게서 권투를 배운다. 영화의 강조점은 의지의 힘과 자기내면의 방향성(동생이 진짜 하고 싶은 것은 미술공부다), 그리고 배우 로드리게즈다. 이전에 연기해본 경험이 전혀 없는 그녀는, 날것 그대로의 신념이 펄펄 살아 땀내를 피운다. 그녀의 얼굴은 파이터답게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며, 눈을 가느스름하게 찌푸릴 때는 그녀의 몸 전체가 빛을 내는 듯하다. 이에 필적할 만한 연기는 따로 없다. 영화 중에는 심지어 모든 배우들이 저마다 각자의 영화에 나와 연기하고 있는 듯한 장면들마저 있다.
다이아나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도장의 가장 촉망되는 선수인 꽃미남 소년(산티아고 더글러스)에게 마음이 끌린다. 록키에게 귀여운 오마주를 바치기라도 하듯 이름도 아드리안이다. 있을 만한 곳에 갈등들이 배치돼 있고, 영화의 후반은, 다이아나가 소녀들과, 소년들과, 그리고 아버지와 싸워나가면서, 승부에서 승부로 이어진다(경기들은 주로 화려하지 않은 미들숏으로 촬영되었으며, 별 실감은 나지 않는다). <터부>에서와 마찬가지로, <걸파이트>는 두 연인 사이의 싸움이라는, 피할 수 없는 클라이맥스를 가지고 있다. 영화는 비록 이른바 ‘달콤한 과학’이라는 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지만, 풀기 위해선 대단히 특별한 훈련이 필요함직한 포스트-마초 인간관계(Post-macho relationship)를 그려내고 있다. 짐 호버먼/ 영화평론가·<빌리지 보이스>
* (<빌리지 보이스> 2002.6.14(<본 아이덴티티>), 2000.10.3(<걸파이트>).짐 호버먼은 미국 영화평단에서 대안영화의 옹호자로 가장 명망이 높은 평론가로 <빌리지 보이스>에 기고하고 있습니다. <씨네21>과 <빌리지 보이스>는 기사교류 관계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