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ory
여고생 다이아나는 학교에서 친구들의 말싸움에 끼어들었다가 주먹질을 하는 바람에 네 번째 정학을 당한다. 남동생이 운동하는 체육관에 찾아갔다가 또 주먹을 날린 다이아나는 권투야말로 자신에게 딱 맞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시큰둥하던 체육관장이 다이아나의 잠재력을 인정함에 따라 이 여성 복서의 기량은 일취월장하고, 급기야 남자친구 아드리안과 링에서 맞붙게 된다.
■ Review
<걸파이트>는 강렬한 눈빛을 던지는 한 소녀의 얼굴로 시작된다. 단순하고 과장된 이미지이지만 단 하나의 숏이 이 영화에 관해 많은 것을 전달해준다. 여기에다 주인공에 관한 개략적인 정보, 그러니까 18살, 여자, 라틴계, 불의를 참지 못하며 고집 셈, 힘도 셈, 브루클린의 노동자 지역 거주, 엄마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세상 사는 데 정신 덜 차린 사람, 이 정도를 알려주는 첫 번째 시퀀스가 지나면 이 영화가 문제 많은 소녀의 성장기를 페미니즘 터치로 다루고 있다는 낌새를 알아차리게 된다.
그렇다고 <걸파이트>가 페미니즘영화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바탕에 깔려 있는 생각은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을 공유하지만, 동시에 성장영화이자 스포츠영화이고 무엇보다 독특한 캐릭터영화다. 혹은 실베스터 스탤론이 나오는 권투영화 <록키>(1976, 존 아빌드슨)를 소녀용 버전으로 뒤집어놓았다고 해도 무리는 없겠다. 록키의 아내 이름과 다이아나의 남자친구 이름이 똑같은 아드리안이라는 사실이 우연은 아닌 것 같다. 근육질 남성영웅의 이야기를 여성의 손길로 슬쩍 비틀어놓는 것만으로도 권투영화 혹은 스포츠영화의 진부한 관습에 쇄신을 가져왔다(작가 겸 감독인 카린 쿠사마를 포함해서 사라, 말타, 매기 등의 이름을 가진 여러 프로듀서들도 모두 여성인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는 마초사회에서 도전적으로 살아남으려는 한 여자아이의 고집스런 성장기다. 라틴계 사람들은 한국사회만큼이나 남녀의 성역할에 관한 고정관념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다이아나의 아버지는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권투 도장에 꼬박꼬박 보낸다. 자신 또한 비록 술 마시고 카드 놀이로 소일할망정 근육만은 우람하다. 그러니 아들보다 더한 성깔과 주먹을 가진 딸은 아버지의 눈, 즉 주류적인 시선으로 보기에 꿀꿀한 부적응자요 앞으로 뭐가 될지 모르는 오발탄쯤 된다.
아들은 아버지의 신념을 물려받는다. 본인은 권투에 별 흥미도 없으면서 누나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체육관에 드나들자 “왜”(Why)라고 묻는다. 이에 대한 다이아나의 답변은 “왜 안 돼”(Why not)이다. 두 단어일망정 그래도 질문보다는 길다는 점에서, 도전을 받는 사람보다 하는 사람이 조금 더 머리를 써야 하는 처지에 있는 것 같다.
여기까지는 별로 새로울 게 없는 <걸파이트>가 독창적인 영화로 뻗어나가는 갈림길은 바로 다이아나의 도전 방식에 있다. 기존의 문제작들은 마초사회에 갇혀있는 여성 주인공들에게 대체로 두 가지 길을 터주었던 것 같다. 단순무식한() 남성성과 대조되는 여성성의 장점들을 보여주거나 아니면 아예 여성만의 공동체, 예컨대 레즈비언 관계를 제시하기도 한다. 그런데 다이아나는 지극히 마초적인 것과 여성성을 동시에 끌어온다. 이 지점이 매우 흥미롭다.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이상적인 여성성 혹은 남성성에 고스란히 들어맞지 않으며, 실제로 살아가는 모든 인간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조금씩 나눠 가진 중간적인 존재라고 한다. 다이아나는 이런 생각을 극적으로 뒷받침해 준다.
(왼쪽부터 차례로)♣ 다이아나는 권투를 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녀는 자신을 비웃는 남자선수들보다도, 어머니를 자살로 내몬 아버지보다도 강해지기 위해 싸우고 또 싸운다.♣ 다이아나의 특기는 빠른 잽니다. 끊임없는 훈련으로 근육을 단련한 다이아나는 여자와 남자를 번갈아 상대선수로 맞이하면서 결승전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마지막 시합, 다이아나는 권투에 미래를 건 연인 아드리안과 마주친다.
그는 육체를 훈련하고 투지를 개발하는 데 어떤 남자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체육관에 도착했을 때 여기저기 낙서처럼 붙어 있는 문구들, “승자는 그만두는 법이 없고, 그만두는 자는 승리하는 법이 없다”는 경구에 눈길을 꽂은 뒤부터, 가장 마초적인 스포츠인 권투를 자기 삶의 동력으로 삼는다. 반면 “사적인 업무 금지”라는 체육관 규칙 제1호를 어기고 도장 안에서 남자친구를 사귈 뿐만 아니라 데이트 하러 갈 때에는 긴 머리를 풀어내린 매력적인 여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다만 여전히 캐주얼한 옷차림에 낮게 구르는 목소리만이 우리로 하여금 이 아가씨가 권투선수 다이아나라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해준다.
다이아나는 평균적인 여성들보다 남성성이 조금 더 강하지만, 그렇다고 성전환 수술이나 남장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식으로 성 정체성 장애를 겪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통합된 정체성을 갖고 있다. 젠더(gender)란 생물학적 차이를 끌어들여 사람 사이를 구별하고 위계질서를 만들어내려는 문화적 고안물이라는 사실을 힘있게 형상화하기, 젠더체계의 어느 한쪽 끝에 서기를 거부하고 그 중간쯤에 자리잡음으로써 젠더의 경계선을 유연하게 만들기, 바로 이런 점들이 칸과 선댄스를 비롯한 유수의 영화제에서 이 영화 <걸파이트>, 특히 다이아나 역의 배우 미셸 로드리게즈를 요란하게 환영한 이유일 것으로 추측된다.
피튀기는 권투장면을 기대하는 스포츠광이나 화끈한 로맨스를 원하는 멜로 관객에게는 영화가 미적지근해 보일 수도 있겠다. 다이아나는 정말로 운동을 잘하지만 그는 록키가 아니다. 더구나 감독은 다이아나와 남자친구에게 한 침대에 누워서 꼬마 남매들처럼 껴안은 채 아침까지 잠만 자도록 시켰다.김소희/ 영화평론가 cafe.daum.net/cwg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