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영화읽기
채플린에 경도된 어느 극작가의 <위대한 독재자> 예찬론
2002-11-07

진정한 웃음의 제왕

지난 여름 극단 파크의 창단 공연으로 <개그맨과 수상>이라는 작품을 써서 박광정 선배의 연출로 대학로 무대에 올렸다. 사실 내가 <개그맨과 수상>이라는 공연대본을 구상하게 된 것은 바로 찰리 채플린의 <위대한 독재자>를 보고 난 뒤였다. 당시 그 작품의 부제로 <채플린 혹은 히틀러>라고 적어두기도 했었다. <개그맨과 수상>은 대중들을 웃기려 하나 전혀 웃음을 주지 못하는 개그맨과 자신은 진지하나 입만 열었다 하면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사는 수상이 웃음에 대한 콤플렉스로 같은 정신병동의 같은 병실에 입원해서 벌어지는 소동을 다룬 일종의 블랙&레드 코미디였다. 더이상 웃음을 줄 수 없음에 괴로워하는 개그맨은 입 큰 개구리 따위의 철지난 레퍼토리를 반복하며, 끊임없이 관객들에게 ‘재밌죠’라고 묻는다. 그러나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고, 위협을 느낀 개그맨은 아이디어 노트에 새로운 개그 소재를 메모하며,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웃어주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반면에 개그맨보다 더 개그맨 같은 수상은 철지난 레드 컴플렉스에 시달리며, ‘Be the Reds’라고 새겨진 옷을 입은 붉은 악마들을 혐오하고, 심지어는 ‘6.25는 무효다. 다시 한판 붙어보자’라는 웃지 못할 냉전식의 연설을 반복한다. 국민들의 비웃음소리를 환청으로 듣던 수상은 급기야 자신의 애국적()인 연설장이 비웃음의 도가니로 전락하는 악몽에 시달린다. 웃음을 갈구하고, 웃음을 두려워하는 상반되는 두 인물-극중 ‘여의도 브라더스’로 묶어서 지칭된다-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풍자해보려는 발상이었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문화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조금이라도 웃기지 않으면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견디질 못하는, 일종의 ‘웃음강박증’ 혹은 ‘유머중독증’을 진단하며, 웃음의 본질에 대하여 자그만 물음을 던져보고 싶었다. 그 질문에 유쾌하게 답해준 영화가 바로 찰리 채플린의 <위대한 독재자>였다. 연극 속의 두 인물, ‘개그맨과 수상’에 대한 최초의 모티브를 얻은 것이 바로 이발사와 독재자의 역할이 중첩되는 채플린의 <위대한 독재자>였다. 웃음의 본질과 웃음의 정치학에 대한 유쾌한 화두도 함께.

에이젠슈테인의 지적처럼, 채플린은 ‘태평스런 어린아이의 웃음’으로 거대하고 끔찍하고 냉혹한 상대를 단순하고 유치하게 만들어 가볍게 물리친다. 그 속에는 파시스트들의 어리석음과 나약함과 위선을 간파하고 폭력과 전쟁을 경멸하는 총명한 광대의 어린아이 같은 웃음이 들어 있다. 허름한 옷차림에 찌그러진 중산모, 푸대 같은 바지, 큼직한 구두에 지팡이를 들고 있는 ‘떠돌이 찰리’는 겁 많고 허약한 존재이긴 하나, 결코 그를 괴롭히는 이들의 희생양이 되지 않는다. 마치 ‘인생과 예술의 경계선인 특수한 중립지대’에 서 있던 카니발의 광대처럼, 그를 억압하는 거대한 적들에게 말없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만면에 미소를 띄는 웃음의 힘으로 끊임없이 저항한다. 누가 봐도 그 어린아이를 둘러싼 현실은 언제나 심각하지만, 그 어린아이의 태평스런 웃음이 고통스런 현실로부터 새로운 희망의 가능성을 전염시켜주는 것이다. 그러한 웃음은 인간성 속에 깃들어진 본능적인 뿌리이다. 웃음은 다른 어떤 것보다 정직하다. 마음 속에 억눌려 있는 감정이나 거부하고 싶은 가치들에 대해서 웃음만큼 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없다. 진정한 웃음은 농담짓거리나 허튼 수작이 아니라, 진정한 웃음을 웃는 그 사람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그 순간 웃음은 웃음의 차원을 넘어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채플린의 웃음은 바로 그런 것이다.

채플린의 진정한 웃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 있다. 바로 두개의 연설장면인데, 하나는 제복을 입은 독재자 힌클이 군중집회에서 게르만족 특유의 거친 어투로 횡설수설 연설을 하는 장면이다. 이는 당시 히틀러의 선전영화를 보면서 그의 연설 스타일을 즉흥적으로 희화화한 것이었다고 한다. 영화 속의 연설장면을 자세히 보면, 채플린은 정확한 독일어를 사용하지 않고, 어투만 흉내내어 말도 안 되는 기이한 언어를 나열하면서 흥분하여 심지어 사레 들리기까지 한다. 이후에도 독재자 힌클의 수다스런 떠벌림은 그치질 않는다. 듣는 이들과는 도무지 소통이 안 되는 의미 없는 독백들로 채워진 여느 정치꾼들의 일방적인 언어들처럼. 다른 하나는, ‘독재자들이 국민들로부터 탈취한 권력을 국민들에게로 돌리고…, 세계를 해방시키고, 국가의 장벽을 없애고, 탐욕자들을 없애고, 증오를 없애기 위하여 싸우자…’는 (힌클의 제복을 입은) 이발사 찰리의 마지막 연설장면인데, 세상에 자행되는 악행에 맞서려는 예술가로서의 채플린 자신의 고뇌를 직접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인간의 탐욕과 증오와 잔인성을 극복하는 새로운 이상적인 세계에 대한 희망을 역설하는 이 연설은 참혹한 세계에 살고 있는 한 어릿광대의 순수한 자의식을 거침없이 토로한 명연기로, 어떠한 배역에서도 볼 수 없는 채플린 자신의 목소리가 절실하게 들려온다. 싸움판에 재미 들린 악동처럼 상대를 못 구해 안달인 부시 행정부는 미국 내의 어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는 이 연설을 한번도 읽지 못한 것일까.

어떠한 예술도 세계에 대한 전망을 내재하지 않는 것은 없다. 만일 우리가 이상적인 세계에 살고 있다면 정치와 예술이 서로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살아 생전에 그런 세계 안에서 살아볼 가능성이 점차 희박해지고 있다고 느껴지는 요즘, 예술과 정치의 얽힌 실타래 가운데 나는 어느 곳에 주로 자리를 잡고 있을 것인지 선택을 해야 하는 게 아닐까라고 슬며시 반문해본다.김재엽/ 극작가 momo-player@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