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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창적인 `인디` 로맨틱코미디영화,<이브의 아름다운 키스>
2002-11-06

■ Story

제시카(제니퍼 웨스트펠트)는 뉴욕에서 <트리뷴>의 카피편집자로 일하고 있는 다소 보수적인 성향의 유대인 여성이다. 20대 후반이고 미혼. 여러 남자를 만나봤지만 성에 차는 사람을 못 찾은 그녀에게 어머니는 돈 잘 벌고 늙수구레한 남자를 추천하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제시카는 신문의 개인광고란에서 릴케의 글귀를 인용한 한 광고를 본다. 여자가 여자 애인을 구하는 광고임에도, 릴케 애호가인 그녀는 약속장소로 나간다. 그곳에서 제시카는 진보적인 갤러리의 부관장으로 일하는 멋진 여자 헬렌(헤더 예르겐슨)을 만난다. 헬렌은 제시카와 마찬가지로 ‘스트레이트’이지만, 뭔가 다른 경험을 찾기 위해 그 광고를 냈던 것. 헬렌을 만난 제시카는 차차 자기 자신에게도 놀라운 일인, ‘여자와의 사랑’에 빠져들고, 주변에서는 한결 밝아진 그녀에게 연애를 시작했냐고 물어오기 시작한다.

■ Review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는 독특한 매력을 가진 영화다. 사람으로 치면 지적이고 다정다감하고 쿨하고 도무지 진부한 구석이 없는 그런 사람이랄까. 마치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브리짓 존스와 <파니 핑크>의 파니 핑크,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가 적절히 다른 비율로 섞여 만들어진 두 여자 캐릭터들이 나오는 우디 앨런의 코미디 같다. ‘남자에게서 제 짝을 찾지 못한 여자가 자신의 취향에 딱 맞는 여자를 만난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화두로 열어가는 <섹스 앤 더 시티>의 한 에피소드가 있다면, 이 영화와 비슷한 스토리가 될지도 모르겠다.

제시카와 헬렌의 연애는, 다분히 우발적으로 시작된다. 여자를 찾는 개인광고를 내겠다고 하자 헬렌은 갤러리 동료로부터 “오늘은 동성애, 내일은 문신인가”라는 비아냥을 듣는다. 헬렌에게 여자와의 연애는 하나의 경험해 보지 못한 ‘라이프스타일’로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에 비해 제시카는 자기에게 맞는 ‘사람’이라면 여자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식이다. 처음 제시카는, 광고를 보고 카페에 나왔다가 “저기, 저는 그게(레즈비언이) 아니거든요”하며 화들짝 생각을 바꿔 자리를 피하려 한다. 하지만 뉴욕에서 나름대로 트렌디한 직업을 가지고 사는 두 여성인 이들은 요가에 관한 이야기로 무리없는 대화를 시작해서, ‘립스틱 색깔’에 관한 대화로 관계의 발전을 예고한다.

“그 립스틱 색깔이 뭐죠” 제시카가 헬렌에게 묻자, 헬렌은 “세 가지 색깔을 섞은 거예요. 마음에 드는 립스틱을 원하면, 사지 말고 섞어요(blend)”라고 말한다. 마음에 드는 립스틱 색깔을 시판되는 제품에서 찾지 못했듯 마음에 드는 남자를 찾지 못했던 제시카는, 더이상 ‘기성품’인 남자와의 연애를 꾀하지 않고 여자와의 연애를 하기로 맘먹는다.

‘섞는다’라는 말이 풍기는 에로틱한 이미지는, 이 영화에서 단지 연상되는 이미지만은 아니다. 제시카와 헬렌은, 실제로 몸을 섞는다.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는 이성애자였던 주인공 제시카가 레즈비언 섹스를 배워 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제시카는 대뜸 ‘실험적인 레즈비언 섹스’에 관한 자료를 수집해 와서 헬렌을 당황시킨다. 헬렌은 제시카에게, “실험적인 것은 지금 필요가 없다”면서 자연스럽게 서로 친밀해지자고 한다. 영화는, 이들이 여자들 특유의 수다를 나누며 친밀함을 쌓는 모습부터 신체접촉을 하는 모습, 가족이나 다른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겪는 갈등과 화해까지, 두명의 이성애자이던 여자가 만나 본격적인 동성애 관계가 되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많은 일들을 세밀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는 100만달러의 예산으로 만든, 비교적 저예산 영화다. 유명 배우는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 영화가 만들어지기까지도 우여곡절이 있었으며 (박스기사 참조), 인디영화인 만큼 먼저 인정을 받은 것도 개봉관이 아닌 영화제에서였다. 2001년 LA필름페스티벌에서 연일 매진사례를 기록하다가 결국 폐막일에 관객상을 받았고, 시나리오와 연기상 부문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으며 영화계에 알려졌다.

(왼쪽부터 차례로)♣ 제시카네 집에 초대받은 헬렌은, 저녁식사 뒤 제시카의 싱글침대에서 제시카와 동침을 하게 된다. 헬렌의 옆남자는 제시카의 직장상사인 조쉬.♣ 제시카와 헬렌은 주로 헬렌의 집에서 은밀한 만남을 가진다.

어느 게이 레즈비언 영화제에서 이 영화의 주연이자 시나리오 공동작가인 두 주연배우는 “이 영화는 퀴어포지티브한 작품인가”라는 질문을 받고는, “글쎄요, 퀴어포지티브하다는 게 어떤 의미죠”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이 영화가 과연 ‘퀴어포지티브’한 영화일까에는 답이 엇갈릴 수 있다. 동성애를 하나의 라이프스타일로 자연스럽게 묘사한다는 점에서는 그럴 수 있고, 단지 그것을 하나의 유행(문신이나 요가 같은)으로서의 라이프스타일로 묘사한다는 점에서 아닐 수도 있다. 이 영화를 ‘로맨틱코미디’라고 부를 수 있는가도 하나의 물음이 될 수 있다.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는, 어쩌면 남녀간의 러브스토리 일색인 기존의 할리우드 로맨틱코미디를 여자와 여자간의 러브스토리라는 소재 채택을 통해서 한번 비꼬는, 안티 로맨틱코미디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심각하고 어두워질 수 있는 소재를 유머러스하고 쿨하게 풀어나갔다는 점에서는 로맨틱코미디의 정서를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시카고 선타임즈>의 로저 에버트는 이 영화를 보고 “똑똑하고 즐거운 영화”라 했고, <가디언>의 개비 우드는 이 영화를 극찬하는 말미에 “그러나 결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면서 두 여자가 릴케의 글귀로 만난다는 것이 낯간지럽다는 점과 영화 속에서 화가로 데뷔하는 제시카의 그림이 별로 잘 그린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차라리 화면에 비추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점을 이 영화의 단점이라면 단점으로 지적했다.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는 유명한 남녀배우들이 나오는 화려한 할리우드의 로맨틱코미디 가운데서 보물처럼 발견되는, 독창적인 ‘인디’ 로맨틱코미디영화다. 할리우드 ‘공장’은 이처럼 미묘한 배합의 ‘색깔’을 만들어내기엔 너무 크고 남성적인 시스템이 아닐까. 이 영화는 그런 의문을 갖게 하는, 잘 ‘섞인’ 한편의 러브스토리다.최수임 sooee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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