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엠 샘>은 기본적으로 이름에 관한 영화다. ‘샘’이라고 너무도 흔하게 이름지어진, 더군다나 ‘장애가 있는’ 사람이라 호명되어 보호소에서 자란 남자가 있다. 그에 의해 ‘루시’라고 너무 구닥다리식으로 이름지어진 딸이 있다. 이 아이는 양부모 밑에서 자라거나 보호소에 맡겨지도록 ‘호명’될 찰라에 있다. 이 영화는 이 두 사람이 이 사회를 어떻게 이름짓는지 보여준다. 이 맥락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제도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는 미국의 복지제도가 일곱살난 딸과 일곱살 정도의 지능을 가진 아버지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다루는지, 다시 말해 그 관계를 어떻게 이름짓는지, 부녀관계라 부를 것인지 말 것인지 심각하고 진지하게 추적해 나가고 있다.
그런 동시에 이 영화는 비틀스에 ‘관한’ 영화로 비쳐지기도 한다. 비틀스가 영미 계통의 서양사람 마음속에 어떻게 자리잡아 있는지, 혹은 자리잡아가고 있는지 이 영화는 잘 보여준다. 비틀스 앞에서, 어쩌면 전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다 샘인지 모른다. 언젠가도 이야기했지만 비틀스는 생성되고 있는 신화의 현장을 보여준다. 그들이 <1>이라는 모음집을 최근에 발매하여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신화의 세계, 분화되기 이전의 ‘하나’의 세계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1>이다. ‘필요한 모든 것은 사랑’뿐인 그 세계는 샘이 원하는 모든 것이 들어 있는 세계이다. 그 행복한 미분화의 신화적 세계가 ‘팔린다’. 이 영화의 따뜻함은 그 분화 이전의, 양수 속의 세계에서 영원히 존재할 준비를 하고 있는 생성 중인 신화적 세계의 따뜻함이다. 비틀스의 가사는 듣기에 따라서 얼마나 유치한가. 그들은 아무리 혁명을 노래해도 따뜻하고 유아적이다. 엄마를 너무나 일찍 잃은, 그래서 애정결핍이 된 ‘비틀’들은 자라서도 엄마의 젖을 물고 있던 때를 그리워하고 그 시기를 한없이 노래한다. 그 시기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비틀스의 사랑노래는 역설적으로 그 ‘부재’를 가리킨다. 후기 현대의 삶을 한마디로 규정하라면 나 같으면 ‘엄마 없는 삶’이라 규정하겠다. 엄마는 이제 제도적으로 없다. 워킹 우먼이나 창녀들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후기 현대의 어떤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이 ‘부재’를 제도적으로 견디거나, 아니면 그저 망각해야 한다. 한편으로 비틀스는 바로 그 망각의 기재이기도 한 것이다.
비틀스는 엄마 없이 자란 샘의 언어적인 모든 것이다. 비틀스의 노래들 중에서 샘이 이해할 수 없는 노래란 없다. 아무도 비틀스를 이해하지 못할 수는 없다. ‘맘마’라는 낱말을 모를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비틀스는 쉽다. 그러나 그들의 쉬운 말들은 나중에 LSD를 통해 선적으로 고양된다. 그래서 깨우친 쉬운 말이 된다. 샘에게 비틀스는 너무나 쉬운, 그러면서도 유일하게 진실된 스승이다. 왜냐, 그들의 행복한 노래들은 거꾸로 ‘엄마 없음’에 관한 노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는 사실 비틀스의 노래 제목처럼 ‘필요한 것은 사랑뿐’(All You Need is Love)이라는 입장을 가진 샘의 시각과 ‘필요한 것은 좀더 많은 기회의 부여’라는 입장을 가진 제도의 시각 그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손을 들어주지 않고 있다. 제도는 냉철하게 양어머니와 저능의 아버지 모두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우리 제도처럼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