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서 열리는 애니메이션페스티벌 취재를 하다보면 “이런 건 참 괜찮다”고 느끼는 점이 있다. 그중 하나가 영화제 기간 중 어린이를 위한 작품을 모아 따로 상영하는 점이다. 지난해 프랑스 안시페스티벌의 경우 ‘유니세프(유엔아동기금) 프로그램’ 코너가 있었다. 1998년 일본 히로시마페스티벌은 ‘어린이를 위한 애니메이션’, ‘어린이에 의한 애니메이션’(어린이들이 직접 만든 작품)으로까지 세분화해 놓았다. 이런 ‘영양가 높은’ 작품이 상영되는 극장은 아이 손을 잡고 온 부모들로 가득 차게 마련이다. 지난 10월2일부터 6일까지 열린 캐나다 오타와페스티벌도 마찬가지였다. 조직위는 아예 경쟁부문 공모전 중 네 번째 섹션을 어린이용 작품만으로 구성했다.
여기엔 두 가지 전제가 깔려 있지 않나 싶다. 첫째 애니메이션이란 어른들을 위한 예술이라는 점, 둘째 그만큼 어린이들을 배려한다는 점이다. “만화영화는 원래 애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인식 아래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발상인 것이다.
몬트리올의 국립영화원(NFBC: National Film Board of Canada) 제작본부에서도 이런 경향은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미셀린 사보이 홍보팀장은 NFBC의 특징을 말해달라는 주문에 “어린이와 여성, 외국인 등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곳”이라고 말했다. 많은 감독들이 어린이를 위한 작품을 만들고 있다고 소개한 그녀는 “방금 출시된 따끈따끈한 작품”이라며 8개의 테이프가 든 예쁜 상자를 선물로 건넸다. <이야기물레>(Talespinners)라는 제목의 비디오 컬렉션. 테이프당 7분 내외의 단편이 하나씩 들어 있었다.
“최근 NFBC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20∼30대 작가들이 5∼9살 어린이를 위해 만든 작품들이지요.” 다양한 국가의 어린이들이 겪는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어린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원작소설이나 구전동화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시리즈라는 설명이다.
<첫눈을 노래하는 장미>(Roses Sing on New Snow)는 가장 먼저 눈길이 간 작품이다. 흰색 에이프런을 단정하게 두른 중국인 소녀가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는 담채풍의 스틸사진이 ‘피리부는 목동’을 연상시켜 신선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수묵애니메이션이 어떤 형태로 발전하고 있는지 엿볼 수 있었다. 폴 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차이나타운 식당에서 일하는 소녀 메일린의 이야기다. 그녀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주방에서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내지만 아버지는 그 명성에 대한 공을 게으른 두 오빠에게로 돌린다. 어느 날 고관 대작이 이 식당을 찾아 최고의 요리인 ‘첫눈을 노래하는 장미’를 먹어보고는 감탄해 요리사가 누구인지 묻는다. 아버지의 거짓말이 들통나는 것은 시간문제. 불려나온 메일린에게 고관 대작은 요리법을 말하라고 다그친다. 그녀는 과연 뭐라고 말했을까. “음식의 맛은 재료나 요리법이 아닌 요리사의 정성에서 나오는 것이랍니다.”
가부장적 인습체제를 깔끔한 이야기와 그림으로 경쾌하게 그려낸 감독의 연출력이 놀라웠다. 감독인 장유안(29)은 상하이에서 태어나 1991년 캐나다로 이민, 대학에서 페인팅과 드로잉을 공부했다. 실크 스크린, TV세트 코디네이터로도 활동 중이라는데 주목할 만했다. 다른 작품에 대해 더 자세한 자료가 필요한 분들은 http://www.nfb.ca/talespinners를 찾아가면 된다. 인터넷으로 주문도 가능한데, NTSC방식인지 미리 확인해야 한다.
최근 국내에서도 미디어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어린이용 작품집이 다양하게 나오고 있는 추세다. 미국이나 일본의 상업적이고 말초적인 작품에 아이들을 방치해온 우리로서는 늦은 감이 있지만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제대로 된 작품을 본 어린이들이라면 언젠가는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 것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제대로 고를 줄은 알 테니.정형모/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hyu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