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졸리니의 영화만큼 사람을 당혹시키는 영화도 없다. 개인적으로는 그리 취향이 맞지 않지만, 영화 마니아들이 거쳐가야 할 관문 중 하나로 파졸리니의 영화들이 버티고 서 있기에 그의 작품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마태복음>처럼 ‘엽기적인 것’하고는 거리가 아주 먼 작품도 있지만, 우리의 뇌리에 파졸리니라는 감독을 각인시킨 작품은 뭐니뭐니해도 <살로, 소돔의 120일>이라고 할 수 있다. 변태 성행위, 배설물 섭취, 참혹한 고문 등 그 영화 속에 등장하는 장면 하나하나가 보는 이들을 당혹하게 만드는데 그치지 않고 역겹게까지 만들기 때문이다. 굳이 저런 영화를 찍어야 했을까? 혹은 굳이 저런 영화를 봐야만 하는 걸까? 하는 아주 근원적인 질문이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리 속에 맴돌 정도니 말이다.
물론 여기서 파졸리니의 영화 <살로, 소돔의 120일>이 내포하고 있는 정치에 대한 불신과 반사회적인 메시지를 논의하고자 함은 아니다. 오히려 가장 독창적이며 동시에 가장 이단적인 예술가였던 파졸리니에게 그 영화를 찍을 수 있도록 영감을 불어넣은 근원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얼마 전 개봉된 필립 카우프만의 <퀼스>는, 그런 의미에서 아주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소돔 120일>을 쓴 원작소설가이자 일종의 변태적인 성행위의 대명사처럼 인식되고 있는 사디즘(sadism:加虐愛慾)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마르키 드 사드의 삶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주목할 점은 이 영화가 제작된 2000년까지, 지난 20세기 말은 사드가 본격적으로 재조명된 시기였다는 사실이다.
그 대표적인 예는 우선 출판계에서 찾을 수 있었다. 사디즘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면서부터 계속 대중의 몰이해 속에 갇혀 있던 사드라는 인물의 생을, 철저한 고증에 따라 새롭게 조망해 평전 <사드>가 91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것이 그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사드가 즐겼던 잔혹한 성행위는 당시 프랑스 귀족사회에서는 보편적 현상이었음’을 밝힌 작가는, 사드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오히려 정치적인 상황과 밀접히 연관돼 만들어졌음을 강조했다. 그런 새로운 시각의 도출은 프랑스 일간지 <리느>가 ‘올해의 좋은 책 1위’로 <사드>를 선정할 정도로 인정을 받게 된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도 번역 출간되어 있으므로 관심있는 이들은 한번쯤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한편 1999년 미국에서 출간된 <사드에 대한 소개>(Introducing Marquis de Sade)는 ‘즐거움의 철학자’로서의 사드를 편하고 재미있게 소개한 책이다. 독특한 일러스트레이션들이 돋보이는 이 책은, 사드를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사드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없애고 그의 작품세계에 빠져들게 하는 힘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편 같은 해 역시 미국에서 출간된 <사드와 함께 집에서: 삶>(At Home With the Marquis De Sade: A Life)는 사드를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봤다는 사실 때문에 적지 않은 주목을 끈 책이다. 이 책의 저자는 사드를 그와 그의 아내 그리고 장모 사이의 관계를 통해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 사이에서 오간 편지들을 근거로, 저자는 사드가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인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 빠져버렸을 뿐이라는 것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있다.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은 대중음악계에서도 사드는 하나의 조용한 화두로 자주 등장했다. 이니그마가 1991년 발매한 싱글 앨범 <사드니스>(Sadeness)가 그 대표적인 예. 물론 사드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발표곡들을 사드로부터 받은 영감을 통해 리믹스해서 내놓은 것이지만, 대중의 평가는 긍정적이었다. 한편 스매싱펌킨스는 1996년 그들의 싱글 앨범 <제로>(Zero)에 수록한 <`Marquis in Spades`>라는 곡을 통해 역시 사드로부터 받은 영감을 통해 욕망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마이 다잉 브라이드, 문스펠, 네이처 등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사드 혹은 사드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로부터 영감을 받은 곡들을 꾸준히 발표했다.그런 면에서 가장 뒤처져 있었던 것은 영화계라고 할 수 있다. 로저 코만이 69년 감독한 <드 사드>, 사드의 후손이 등장하는 토브 후퍼 감독의 95년작 <나이트메어의 저주>(Tobe Hooper’s Night Terrors), 96년에 제작된 기네스 기비 감독의 <마르키스 드 사드>(Marquis de Sade) 등 몇몇 B급영화들이 사드를 소재도 만들어졌지만, 이 영화들 속의 사드는 기존의 고정관념들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직접적으로 사드의 생애를 재조명한 <퀼스>는 큰 의미를 둘 만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사드의 작품을 재해석하는 영화들은 조금씩 만들어졌다. <살로, 소돔의 120일> 이후, 영국감독 크리스 보거가 1977년 사드의 소설 <저스틴>을 바탕으로 <`Cruel Passion`>을 내놓은 것을 비롯 총 6편의 작품이 더 만들어졌던 것. 물론 <살로…>을 제외하고는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여하튼 이번에 개봉된 <퀼스>를 계기로, ‘사디즘의 창시자이자 변태괴물’이라는 사드에 대한 그릇된 사람들의 시각이 그나마 조금 교정될 것으로 보인다. 역사 속의 인물을 평가할 때 항상 당시의 시대상황을 염두해둬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인물의 다양한 측면을 검토해봐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한편이 그 어떤 훌륭한 논문들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필립 카우프만은 <퀼스>를 통해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이철민/ 인터넷 칼럼니스트 chulmin@hipop.com
▶<퀼스> 공식 홈페이지 http://www.foxsearchlight.com/quills/options.htm
▶<퀼스> 팬사이트 http://www.discoverkate.com/quills/
▶사드 마니아 홈페이지 http://www.jah.ne.jp/_piza/SADEE.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