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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4> 촬영부 송혜경
2002-10-30

˝할 수 있어. 난 힘이 세거든!˝

“영화판에는 박봉이라는 개념도 없습니다. 4대 보험이나 퇴직금이 해당되지도 않고요. 정말 영화가 좋아서 달려드는 젊은이들의 열정을 제작자들은 악용하고 있습니다. 일도 배우는데 돈까지 바라냐는 거죠.”(‘비둘기 둥지’에 실린 한 촬영보조의 글)

송혜경(29)은 두루뭉술한 글을 원했다. 개인적 고민이 밖으로 삐져 나올 때마다 “이 얘긴 빼주실 거죠”확인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청춘>(2000), <스물 넷>(2002)의 촬영부 막내를 거쳐 에서 ‘서드’(third)를 맡게 된 그녀의 얼굴에는 욕망 대신 조용한 체념이 자리잡는 듯했다. 영화가 좋아서 시작한 일인데, 이 바닥도 알고보니 각종 이해가 얽혀 있는 비즈니스 세계라는 사실이 못내 그녀의 속내를 불편하게 했다. “그냥 예술하고 싶다는 마음이었지만, 지금은 조금 흔들리기도 해요”그리고 결국 “꿈이요 촬영감독 하는 건데, 아무래도 어렵지 않을까 싶어요” 그만 한숨이 폭 나와버린다. 다시 “이 얘긴 빼주세요.”확인 작업. 자신이 여자라서, 자기가 한 말이 괜히 충무로의 여자 스탭을 대표하는 발언이라도 돼버릴까 노심초사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고민이, 갈등이 비단 여자 스탭으로서 겪는 현장의 어려움이라고 받아들이긴 힘들었다. 경영학을 공부하던 ‘첫 번째’대학 시절, 이상하게도 정을 붙이지 못하고 주위를 두리번대던 그녀는 결국 서울예대에서 ‘두 번째’ 대학생활을 시작한다. 사진이 좋아 아버지의 사진기를 흘끔거리던 어린 시절에도 그녀를 사로잡는 열정의 근원은 사진도 공부도 아니었다. 아는 선배들을 따라다니며 사물을 프레임 안에 가두는 연습을 하면서 차츰 그녀의 꿈은 형태를 갖추었다. 연기와 스탭 전공으로 나뉘는 입학 창구 앞에서 그녀는 비로소 마음을 굳힐 수 있었다.

전공 수업, 부학장 당선 등으로 바쁜 생활과 뷰파인더 안에 담기는 스타일리시한 영상의 매력에 푸욱 빠질 때쯤 ‘신호’가 왔다. 교수님이었던 함순호가 장편 데뷔작 <청춘>을 준비하면서 그녀에게 러브콜을 보낸 것이다. 예쁘게 말해 러브콜이지, “너, 현장 나갈 때 됐지 같이 가자” 이거였다. 모스크바 국립 영화학교에서 촬영을 공부하고, 귀국 뒤 <다우징> <그녀 이야기> 등에서 독창적인 카메라 구도로 주목받은 함순호 감독의 시적이고도 섬세한 영상이 새로운 리듬감을 만난 영화가 <청춘>인데, 그녀에겐 현장뿐 아니라 사회를, 인간을 경험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세컷의 필모를 짜면서, 그녀는 부모님한테 아직 첫 작품을 공개하지 못했다. “보여드릴 수 없더라구요. 좀 야하잖아요. 그 영화가….”(웃음) 영화과 면접 시험 중 교수가 던진 한마디 “여자가 촬영을 전공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텐데”에 그녀의 대답은 “알아요. 근데 저 힘세요”였다. 지금도 카메라 무게보다 더 벅차게 삶이 짓누를 때마다 속으로 외친다. 할 수 있어. 난 힘이 세거든…. 글 심지현 simssisi@dreamx.net·사진 오계옥 klara@hani.co.kr

프로필

→ 1974년생

→ 서울예대 촬영 전공 99학번

→ <청춘>, <스물넷>, 촬영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