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철 열심히 극장을 찾아다니다 보면, 굳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그 나라의 영화 배급 리듬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된다. 가령, 프랑스의 경우 여름에는 ‘괜찮은’ 신작들이 종적을 감추는 반면,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는 9월과 10월에는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했거나 까다로운 비평가들의 안목을 만족시킨 영화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다. 올해도 어김없이 지난 5월 칸 영화제에 출품됐던 영화 7편이 현재 상영중이며 그 외에도 볼 만한 영화들이 줄지어 있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이런 영화들의 상영 기간이 줄어들어, 개봉하자마자 열 일을 제쳐 두고 보지 않으면 쾨쾨한 냄새가 나는 작은 극장에서 시야를 방해받지 않기 위해 2시간 내내 허리를 꼿꼿이 펴고 보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르 몽드>의 최근 기사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요즘 영화들의 극장 상영 기간은 평균 2주 정도다. 이처럼 상영 기간이 짧아진 데는 꼬리를 무는 일련의 이유들이 존재하나, 무엇보다 극장 개봉을 기다리는 영화들이 현격히 증가한 탓을 들 수 있다. 단기간에 승부를 내야 하는 치열한 경쟁 구조 속에서 배급사들은 가능한 한 많은 프린트로 영화배급을 하려 하며, 자신들이 배급하는 영화가 그저 스쳐 지나가지 않도록 광고에 많은 비용을 할애한다. 1998년 <시간의 복도>라는 영화가 600개의 프린트로 극장 개봉한 것이 프랑스에서 화제가 됐었지만, 그 후 최대 프린트 수는 매년 갱신돼 2001년에는 상영 첫 주 800개 이상의 프린트로 개봉한 영화가 4편이나 됐다(올해 <스파이더맨>은 900개 이상의 프린트로 개봉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프랑스에 국한된 게 아니다. 멀티플렉스의 증가로 96년 극장 스크린 수 2000개에서 2002년 3200개로 6년 만에 1200개가 늘어난 영국에서는 매년 300편 이상의 영화들이 배급되는데, 할리우드 블록 버스터 영화들은 보통 500개 이상의 프린트로 개봉한다(<해리 포터>는 1천 개를 넘었다). 독일도 지난 5년 사이에 500개 이상의 프린트로 개봉하는 영화가 5배 이상 증가해, 2001년에는 전체에서 이 영화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8.2%(35편)나 되었다. 그 가운데 프린트 1000개를 넘은 세 편은 모두 할리우드 영화다. 멀티플렉스 건설이 유럽 가운데 가장 더딘 이탈리아에서도 지난 7년간 평균 프린트 수가 2배 이상 증가하였고, 최대 프린트 수도 매년 늘어나 2002년 1월 <반지의 제왕>이 700개 이상의 프린트로 개봉한 데 이어 올 10월 11일에는 로베르토 베니니의 신작 <피노키오>가 800개 이상의 프린트로 이탈리아 전역에서 동시 개봉하였다.
이쯤 되면 짐작하겠지만, 유럽에서 프린트의 인플레를 주동하고 있는 건 할리우드 영화 배급사다. 그리고 이의 최대 희생자는 독립 영화 배급사다. 멀티플렉스들이 ‘어려운’ 영화의 상영을 기피하고, 상영하더라도 할리우드 배급사의 전략을 따르도록 강요함으로써 이들 독립 배급사의 상황은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 유럽 영화 산업 관계자들은 프린트 수의 폭발적인 증가가 언젠가 모두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야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점에 누구나 동의하지만, 그 문제가 정책적으로 해결되기보다는 시장의 자정 작용에 의해 자연스럽게 해결되기를 바라고 있다.
파리/박지회·파리3대학 영화학과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