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11 사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은 산업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금융계, 관광업계 그리고 항공업계 등은 직접적으로 큰 타격을 입고 한동안 어두운 터널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을 정도다. 하지만 무역센터빌딩이 나오는 장면이 들어 있던 <스파이더 맨>과 직접적으로 테러를 소재로 하고 있던 <콜래트럴 데미지> <썸 오브 올 피어스>의 개봉 연기 소식을 통해, 당시 미국인 대다수가 느끼고 있는 극도의 ‘불안감’을 대변해준 영화업계도 타격을 입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간에 가기 두려워하게 되면서, 극장수입이 현격히 줄어들었던 것. 물론 한쪽에서는 비디오 대여업이 반짝 경기를 누리기도 했지만, 완성된 영화의 개봉을 미루고 이미 개봉된 영화들의 관객 감소를 지켜봐야 했던 미국 영화업계 관계자들의 심정은 참담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뒤 1년여가 지난 얼마 전부터, 성격은 다르지만 유사한 상황이 미국에서 발생하고 있다. 그 시작은 지난 10월2일부터 워싱턴 D.C의 외곽지역에서 연속적으로 일어난 무차별 저격사건. 지난 10월16일까지 총 12번의 저격이 시도되어 FBI 요원을 비롯한 사망 9명, 중상 2명의 희생자를 낸 이번 사건은, 9·11 테러와는 정반대 지점에서 미국인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아니라 한적한 교외의 주유소 같은 곳을 골라, 대규모 테러가 아닌 1명씩 노리는 저격을, 이슬람과 같은 거대한 외부의 적이 아닌 것으로 추정되는 내부의 적에 의해 일어났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인들이 중간에 터진 발리섬 폭탄테러 사건보다 이 사건에 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은, 이 사건으로 인해 올 할로윈데이 소비 지출 규모가 지난해보다 낮을 것이라고 밝힌 전미소매업연맹(NRF)의 발표에서 잘 드러났다.
그렇게 미국인들을 공포로 몰아넣는 무차별 저격사건의 등장으로 인해, 제2의 <콜래트럴 데미지>가 되어버린 영화 한편이 있어 최근 큰 화제가 되었다. 그 영화의 제목은 공중전화박스를 뜻하는 <Phone Booth>. 언뜻 제목만 보면 이번 사건과 전혀 무관할 것 같은 이 영화는, 개봉예정일이었던 11월15일을 약 한달 정도 앞두고 개봉이 무기한 미뤄지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이유인즉 이 영화가 저격수를 소재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화의 시놉시스는 참신한(?) 저격수를 등장시키고 있다. 뉴욕 53번가를 걷던 한 광고회사 직원이 벨이 울리는 공중전화를 별 생각없이 받았는데, 전화 속 상대방이 ‘만약 전화를 끊으면 쏴버리겠다’고 위협한다는 설정인 것. 뉴욕 한복판에서 이른바 ‘투명의 관’ 안에 갇힌 주인공은 전화를 끊지 못하고 시간을 흘려보내게 되는데, 그러다 전화를 쓰려는 사람들과 마찰이 생기면서 폭력이 오가고 그것이 커져 경찰을 출동시키게 된다.문제는 출동된 경찰이 저격수가 있다는 주인공의 말을 믿지 않고, 주인공을 위험인물로 생각하고 진압하려 한다는 점. 그리고 그 과정이 방송을 통해 중계되면서 그의 아내와 그의 정부까지 공중전화박스 근처에 나타나면서 상황이 점차 악화된다. 당연히 그런 상황을 저격수는 즐기고, 저격수와 주인공 그리고 경찰반장 사이에 심리게임이 펼쳐진다는 것이 영화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문제는 여기에 등장하는 저격수의 설정이, 이번 사건을 연상시킨다는 데 있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저격범으로부터 위협을 받는 주인공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미국인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사실. 물론 사건이 빨리 해결될 경우 원래의 개봉일자를 고수할 수도 있었지만, 그 가능성이 물건너가면서 개봉연기는 확정되었다. ‘공식’ 오픈하지 않고 있던 공식 홈페이지조차 사라지고, 제작사인 폭스사의 홈페이지로 자동으로 이동되고 있는 중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 참신한 발상에 기반한 영화를 기다리는 이들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2000년 중반에 짐 캐리가 이 영화의 주인공 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소문이 인터넷에 퍼지기 시작한 시점부터 그런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 또한 <세인트 엘모의 열정> <의뢰인> <타임 투 킬> <배트맨 포에버> <8MM> 등을 감독한 이후, 이렇다 할 대작을 내지 못한 조엘 슈머허에게 기대를 걸었던 이들도 많았다. 그러다 최근에는 <하트의 전쟁>에서 주인공 토머스 하트 중위로,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는 데니 워트워 형사로 강한 인상을 남긴 콜린 파렐이 짐 캐리를 대신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의 새로운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이들도 가세한 상황이었다. 뉴욕이 무대지만, 실제 촬영의 대부분은 LA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인터넷에서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다 된 밥에 재를 뿌려버린 무차별 저격사건이, 제작사인 이십세기 폭스사와 개봉을 기다리던 관객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야속했을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여튼 <Phone Booth>의 개봉연기에 대한 아쉬움과는 상관없이, 제작사와 잠재 관객 중 상당수가 이번 사태를 미국 내에서 총기규제를 강화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 분명하다. 매번 비슷한 총기사고가 날 때마다 규제강화에 대한 요구가 빗발쳤지만 별다른 진전이 없는 상태에서, 이번 사태가 심각한 경종을 울리고 있다고 해석하는 미국인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기 때문. 술을 사려면 20살이 넘더라도 반드시 신분증을 제시해야 하면서도, 18살만 넘으면 별다른 제지없이 총을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나라, 미국에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총알의 공포가, 그들이 그토록 힘겹게 이루어놓은 모든 것을 앗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철민/ 인터넷 칼럼니스트 chulmin@hipop.com
<Phone Booth> 공식 홈페이지 : http://www.phoneboothmovie.com
<Phone Booth> 시나리오 리뷰 : http://www.chud.com/reviews/phone.ph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