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 영광>을 400만명이나 보았다니, 일년에 영화 두어 편 보는 사람들까지 이 영화를 보았다는 뜻이다. 정말 극장에는 40대 이상 관객도 곧잘 눈에 띄었고, 뜨악하게도 가족단위로 온 관객도 있었다. 세상에나… ‘15세 입장가’인 것도 아연할 원색적인 이 영화를 가족이 함께 보다니 나는 두번 보았다, 처음엔 웃으면서, 두 번째는 펑펑 울면서 말이다.
영화는 솔직하다. 우아한 주제를 천박한 키치로 푸는 이중의 ‘왕재수’를 구사하는 것이 아니라, 주제부터 표현방식까지 통째로 천박하다. “그려! 우리 집안은 깡패여! 어쩔 것이여”라는 김정은의 한마디는 우리의 내면에 통렬한 카타르시스를 던진다. 그래 우리는 모두 천출이다. 그래서인지 그런 내 가족을 생각하면 마음이 짠하고, 우린 권력 앞에 비굴해지며, 사랑의 신성함 따위 그다지 믿지 않는다. 낯짝처럼 훤하게 성기를 찍으라던 ‘래리 플린트’의 말처럼, 영화는 우리의 치부에 렌즈를 들이댄다. 영화는 ‘천출 의식’과 ‘가족간의 숙명적 연대감’ 그리고 ‘자식을 통한 신분 상승 욕구’라는 우리의 어쩔 수 없는 무의식과 욕망을 노골적으로 깔아놓고, 그 위에 우리의 비겁과, 속물적 애정관을 포개 놓는다.
가족이란…
나의 가문을 먼저 까보이겠다. 한국전쟁으로 소년 가장이 된 나의 아버지는 무작정 상경하여 날품팔이를 전전하다, 60년대에 영세 소상점 경영자가 된다. 20년간 품위와는 거리가 먼 여러 장사를 통해 약간의 잉여자본을 축적하고, 운 좋게도 재테크에 성공하여, 80년대에 이르러 꿈에 그리던 중산층이 되었다. 덕분에 모두 대학교육을 받은 나의 형제들은 이런 우리 집안을 ‘6두품’이라 불렀다. 그래봤자 성골, 진골과는 차이가 난다는 뜻이다.
우리나라는 5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이자, 2차대전 직후의 신생독립국이다. 5천년 역사의 자존심은 일제 강점기를 통해 짓밟혔으며, 전통의 권위는 한국전쟁을 통해 확인사살되었다. 전쟁 직후 원조경제를 영위하던 우리나라가 개발독재시대를 거쳐 천민자본주의적 급성장을 이루면서 이제 겨우 밥술이나 뜨게 된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근현대사가 입증하듯이 우리나라에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갖춘 귀족이라 할 만한 계층이 희박하다. 좋은 집안 출신이라는 사람을 보면 나는 “너희 증조할아버지가 친일파였냐 아니면 너희 할아버지가 미군 물건 팔았냐 아니면 너희 아버지가 독재정권에 빌붙어 밀수나, 탈세나, 비리를 해먹었냐 그것도 아니면 너희 어머니가 복부인이었냐”고 묻고 싶은 욕구를 느끼곤 했다. 6두품인 내가 오버해서 박사과정쯤 오고보니, ‘진짜 명문가’도 존재한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지만, 그건 가방 끈이 길지 않았던들 영영 알 길이 없었던 ‘미지의 세계’다. 나는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속엔 일종의 연대감 같은, ‘귀족이 아닌 자로서의 천출 의식’이 있다고 생각한다. “애비는 종이었다”는 시구 마냥 그러한 연대감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가족’이다. 집 밖에서 우연히 가족을 만나면 서글픈 법이다.
여수에서 일가를 이룬 조폭 집안의 딸, 김정은은 자신의 출신 성분을 망각하지도, 정체성을 혼동하지도 않고 자랐다. 그녀는 지역에서 세(勢)를 형성하고, 자본을 축적한 집안의 고명딸로서 피아노, 별자리 등 고급스런 취향의 교육을 남부럽지 않게 받으며, 섹스 따위는 껌딱지로 여기는 집안 남자들 틈에서 오히려 기본적인 성교육도 못 받았을 만큼 순진하고, 보수적으로 자랐다. 힘있는 집구석 티를 내지 않으려 자숙하며 자란 탓에 조금은 결벽적이고, 자폐적인 면도 지니고 있다. 그녀가 내숭이라고 내숭은 오히려 그녀의 진실이다. 그녀는 ‘성질 죽이고 사는’ 조폭의 딸이자, ‘포장도 안 뜯은’ 처녀이며, 아버지 말씀에 순종하고 ‘순박한()’ 오빠들을 사랑하는 효녀이다.
박근형과 유동근은 비정한 조폭의 모습보다는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욕망의 소유자로 보여진다. 그들은 비록 험하게 살아도 딸/여동생은 공주처럼 귀하게 키워서, 이제는 어디서 괜찮은 놈을 잡아다가 으르고 뺨쳐 시집까지 보내는 끝간 데 없는 가족애를 보여준다. 그것은 물론 자식사랑인 동시에 자식을 통한 신분 상승 욕구이다. 그들 패밀리 아니더라도 우리네 부모들은 파출부를 해서라도 뼈빠지게 과외시키고, 돈이 좀 있다는 부모들은 자식을 청정()지역에 보내놓고 피 같은 달러를 부치거나, 아예 별거도 서슴지 않는다. 그도 저도 안 되면 “집안에 의사나 검·판사 하나는 있어야지” 소리를 입버릇처럼 되뇌며 딸자식을 꽃단장해 바리바리 싸 시집보냄으로써, 한 많은 천출성을 물갈이하고, ‘가문의 영광’을 보고자 한다. ‘애비는 종’이었을망정 개처럼 벌어서 정승을 사고자 하는 이 욕망은 바로 전통의 폐허 위에 40년 만에 기적으로 세운 천민자본주의의 나라, ‘급조! 대한민국’사회의 밑바닥에서 중산층까지 함께 끓어오르는 징∼한 욕망인 것이다. 맞나 맞으면 맞아야제~ 퍽!
권력이란…
앨빈 토플러의 <권력이동> 에는 권력이 ‘완력->재력->정보력’의 형태로 역사적으로 이동한다고 나온다. 그들 패밀리는 가장 원초적인 형태의 권력인 완력을 근간으로 하여 재력을 쌓았고, 이제 정보력을 획득하고자 한다. 권력은 어떻게 다가오는가 처음엔 폭력으로 상대를 위협한다. 근대를 운양호의 대포소리로 맞은 우리는 잘 안다. 그러나 위협만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은 불안정하고 비효율적이다. 상대가 권위를 인정하고, 지배에 동의하며, 존경하고 따라야 비로소 안정적인 권력관계가 완성된다. 제국주의라면 식민지 백성에게 힘과 돈과 지식을 보여주며, 그것이 좋은 것인 줄을 스스로 알도록 하여야 하며, 파시즘 국가라면 국민들에게 또한 그리한다. ‘개화’라고도 하고, ‘국민교육’이라고도 하는 이 과정을 통해 피지배자의 추인과, 동의와, 감화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정준호는 처음에는 그들에게 얻어터지며 공포에 질렸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들을 경멸했다. 최고의 엘리트, 서울 법대를 나온 벤처사업가인 그가 맞을 때야 별수 없다지만, 아닐 때는 “그깟 깡패 나부랭이들… 검찰에 신고해서…”라고 자존심을 세웠다. 그러나 단란주점에서 그는 보았다. 예비 법조인, 사법 연수원생 명함이 개짝나는 상황에서 구세주처럼 납신 ‘법보다 가까운 주먹’의 위대함과 그 성스러움을! 그는 이제 그들을 경멸하기는커녕 경외하며, 그들을 자신의 든든한 ‘뒷배’로 여긴다. 여기에 바로 훈련/학습과정이 따라온다. “진경이는 이제 네 여자잉께~ 네가 구해야제”라는 과제를 하달받은 그는 패밀리로의 입문 과정을 성공적으로 치루어내어, 유동근에게 흡족한 평가를 받는다. 그는 이제 드디어 자신을 패밀리의 일원으로 느낀다. 그는 완전히 동화되어 결혼식장에서는 “형님”소리와 전라도 사투리와 발길질이 저절로 나온다. 놀랍지 않은가
일찍이 우리 영화 중에 권력의 노정을 이처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던 영화가 또 있었던가 영화 <대부>가 단순한 마피아 폭력영화가 아니라, 권력에 관한 위대한 고전일 수 있는 것은, 패밀리와는 다른 삶을 살고자 했던 마피아의 아들이, 아버지의 총격사건을 겪으면서 폭력적 권력에 대한 태도와 더불어 자신의 정체성을 변화시켜 나가는 과정이 그려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문의 영광>은 비천한 형태를 띠고 있지만, 권력의 운영방식과 그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권력에 관한 영화’로도 읽힌다. 그래서일까 TV사극에서 중후한 왕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던, 박근형과 유동근은 그대로 왕인 것 같다. 박근형은 용맹과 무예로 개국을 이룬 이성계 같고, 유동근은 피범벅으로 수성에 성공하여 이후 문물의 시대를 연 이방원 같다. 그들은 하나의 왕국의 위대한 권력자들이다.
사랑이란…
이 영화는 로맨스를 그리고 있는 듯하지만, 오히려 주제는 ‘안티-사랑’이다. 영화가 말하는 사랑이란, 뻔한 상황에 의해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하며, ‘사랑한다 말하고 나니 사랑이 생겨나는’ 지극히 수행적인 것이다. 여기엔 어떤 신비도 없다. 생판 모르는 술 취한 남녀를 한이불 속에서 재우고 나니, “겁나게 진도가 빨라 부는” 것이 사랑이요, 사랑 유무보다는 ‘떡을 치는’ 행위와 처녀성 여부가 훨씬 본질적인 화제로 다뤄진다. 김정은은 “성교횟수가 중요하지는 않다”는 ‘구성애’식 논거를 펴보지만, 영화의 주제는 그 반대이다. 영화의 서사는 김정은이 “왜 우리 가족을 멸시하느냐”고 눈물로 항변한 장면에서 그가 그녀의 진정성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처럼 기술되지만, 그들 로맨스의 전 과정은 패밀리의 엄정하고 치밀한 기획과 관리에 의한 것이다. 우리가 경멸해 마지않는 패밀리의 저속한 애정관은 엄청난 실효를 거둔다. 남자에게는 음식을, 여자에게는 강아지를 선물하면 된다는 그들의 교양은 적중하며, 남녀를 깜깜한 통(엘리베이터) 속에 뱀과 함께 집어넣으면 화학반응이 일어난다는 그들의 소박한 자연철학은 우리의 사변적 형이상학을 뛰어넘어 놀라운 수행력을 발휘한다. 그뿐인가 매부로 여기는 사람을 “우리끼리니까 편하게 놀자”며 여자 나오는 술집에 데려가 “논다”. 연적에게는 물좋은 미끼를 던지면 애욕과 질투가 발화하여 쉽게 끝장이 난다. 왜 난데없이 유동근 바람피우는 이야기가 나오느냐고 이 영화의 주제는 ‘사랑은 신비한 것도 아니며, 결혼을 하는 데는 물론, 유지하는 데 있어서도 충분조건은커녕 필요조건도 못 된다’는 것이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다더니만…. 그래도 그들은 사랑한 것 아니었냐고 글쎄… 김정은은 정준호를 두어번 만나고 나니 “너 주기는 아깝게” 느껴졌고, 정준호로서도 결코 밑지는 장사는 아니다. 병원에서 발급한 ‘처녀 증명서’에, 그의 어머니 말마따나 “딸은 참해 보이며” 무엇보다 패밀리의 위력에 감복한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지 않았을까 ‘지방 호족이자, 재벌의 사위이구먼 까짓 뭐가 문제랴’
이 영화는 가족과, 권력과, 사랑에 대한 우리의 천박한 자의식을 까발리는 동시에, 천출이 아닌 척하는 우리의 속물적 허위의식(snobbism)을 통렬히 조롱한다. 400만명이 이 영화를 보며 무엇을 느꼈을까 비천한 우리 무의식의 참혹한 진경 산수화를 400만명과 함께 보고 나니, 400만명이 모두 내 가족 같다. 귀족이 아닌 나의,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애틋한 가족 말이다.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chingmee@freech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