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ory
영문학 연구생 자격으로 런던을 방문한 미국인 롤랜드는 대영박물관의 고서를 뒤지던 중 100년 전에 쓰인 편지 한통을 발견한다. 그것은 충실한 결혼생활의 모범으로 추앙받아온 시인 랜돌프 헨리 애시가 아내가 아닌 다른 여인에게 몰두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단서가 된다. 롤랜드는 빅토리아 시대에 정통한 여류학자 모드 베일리와 함께 옛 시인의 사랑을 추적한다.
■ Review
소유 혹은 사로잡힘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진 <포제션>은 제목 그대로 무엇엔가 홀려 있는 사람들에 관한 영화다. 낭만적으로 드리워져 있는 몇겹의 주름을 펼쳐가며 그 사로잡힘의 실체를 하나하나 매만지고 향기 맡는 일에 관심있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이기도 하다.
제일 먼저 눈에 보이는 것은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는 두쌍의 러브스토리다. 상이한 문화적 환경에 속한 두 커플의 서로 다른 애정관, 그리고 어느 결에 번져오는 사랑의 파동에 서서히 물들어가는 모습이야말로 이 우아한 멜로드라마가 전해주고 싶어하는 제일 큰 이야기일 것이다.
<포제션>은 또한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적 주름에 관한 까발림이기도 하다. 63년간이나 재위한 여왕 치세에 제국주의의 황금기와 민주정치의 기틀을 한꺼번에 이루었던 영국의 19세기 후반은 도덕적인 엄격함의 이면에 위선과 열정이 공존했던 시대로 알려져 있다. 랜돌프 헨리 애시(제레미 노댐)는 비록 가공의 인물이지만 이같은 빅토리아 시대의 이상에 걸맞은 계관시인이며, 동시에 이 시대에 대한 현대인의 호기심에 부응하는 비밀스런 스캔들을 품고 있다. 그가 열애에 빠진 대상은 역시 가공의 인물이긴 하지만 놀랍게도(이 촌스러운 감탄사는 빅토리아 시대로 설정한 작가의 의도에 맞장구를 치기 위한 것이다) 페미니스트이자 레즈비언인 여류 시인 크리스타벨 라모트(제니퍼 엘)이다.
이들의 흔적을 추적하는 두명의 현대인은 영국과 미국 혹은 유럽과 신대륙의 차이에 관해 농담으로도 써먹을 수 있을 만큼 널리 알려진 이미지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미국 사람인 롤랜드 미첼(아론 에크하트)은 억세고 교양없어 보이지만 열정적이고 솔직하며 알고 보면 순진한 구석도 있다. 반면 영국인 모드 베일리 박사 역을 맡은 기네스 팰트로는 <셰익스피어 인 러브>나 <슬라이딩 도어즈>에서도 구사한 적이 있는 예의 그 영국식 악센트와 함께, 우아하고 쿨하며 확신에 차 있지만 무언가 변화를 갈망하는 듯한 얼굴을 보여준다.
둘은 많이 다르면서도 사람 사이에 내적으로 친밀한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을 귀찮아하고 두려워하는 깍쟁이 현대인이라는 점에서 서로 닮았다. 처음에 두 사람은 엄격한 도덕률 뒤에 숨겨진 화려하고 치열한 빅토리아 시대의 열정에 대한 발견자이자 화자 역할에 머문다. 그러나 과거 인물들의 러브스토리가 점차 윤곽을 드러냄에 따라 네명의 연인들은 모두 한장의 태피스트리 속으로 짜여 들어간다. 이 영화가 플래시백 기법을 지닌 병렬구조임에도 불구하고, 장면전환을 나타내는 특별한 광학효과 대신 같은 공간 안에 옛 인물과 현대 인물을 함께 두고 카메라를 회전(panning)하거나 문을 여닫으며 촬영하는 방식을 취한 것은 이런 의도와 상관이 있을 것이다.
(왼쪽부터 차례로)♣ 빅토리아 시대의 계율을 넘어선 애시와 라모트의 지적이며 격정적인 사랑은 애절하게 시작하지만, 끝내 비극으로 마무리된다.♣ 애시와 라모트의 사랑 이야기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미첼과 베일리는 사랑에 빠진다. 이들이 밝혀내는 옛 커플의 에피소드는 이 현대 커플의 현실 속 관계로 바뀌곤 한다.♣ 미첼은 계관시인 애시에게 숨겨놓은 애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감잡지만, 교수는 좀처럼 그를 믿지 못한다.♣ 라모트에게 보낸 애시의 연서가 비싼 가격에 거래될 것을 안 연구자들은 미첼의 뒤를 따른다.
그런데 닐 라뷰트 감독의 의도를 배반하면서 굳이 편가르기를 시도해보자면, 현대쪽보다는 옛 연인들에게 손을 들어주겠다. 옛날을 신비화하면서 노스탤지어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은 현대인의 못 말리는 고질병일 테지만, 그래도 라파엘로의 그림에 나오는 비너스 같은 크리스타벨 라모트쪽이 훨씬 매혹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이 여인의 승부는 머리채를 길게 늘어뜨리는 두개의 장면에서 결판이 난다. 보는 우리가 호흡을 멈춰야만 할 이 에로틱한 순간에, 기네스 팰트로의 창백한 금발보다는 용감한 페미니스트/레즈비언 여류 시인이 길게 땋은 머리를 페티코트 위에 늘여뜨리고 있을 때 더 숨막히는 느낌이다. 이것은 애당초 요크셔의 해변과 음침한 다락방, 무덤 도굴에 이르는 모험담을 끌고 다녀야 하는 기네스 팰트로에게 더 불리한 게임이었는지도 모른다.
<포제션>은 또한 책과 영화의 차이, 그러니까 언어의 즐거움과 시각적 풍미가 대비되는 예라고 할 만하다. 1990년에 영국 부커상을 수상한 A.S. 바이어트의 동명소설을 토대로 한 이 영화는, 훌륭한 소설이 영화로 옮겨질 때 늘 그러하듯 어떤 것은 잃고 어떤 것은 얻는다. 대영박물관 내부가 영화 속에서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홍보문구 그대로, 옛 시절의 독서광이나 애서가들이 거닐다 튀어나올 것 같은 커다란 서가는 그 자체로 특별하다. 영국 각지의 로케이션, 고전과 현대를 조화롭게 연결하는 프로덕션디자인과 의상의 세련미 또한 잘 차려진 커다란 저녁상을 보는 듯한 시각적 포만감을 준다.
반면 한 시대의 사랑과 예술에 대해 필시 그윽하고 깊이있는 묘사로 가득 차 있을 원작소설의 느낌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얄팍한 영화가 탁월한 소설 한 편을 또 망쳐놨구먼’ 하며 혀를 찰 사람도 있겠지만, 600쪽에 이른다는 영어소설을 읽을 재간이 없는 나로서는 두개의 우아하고 머리 좋은 사랑 이야기를 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빅토리아풍의 인사를 전하겠다. 그것 또한 하나의 유혹이자 섹시한 쾌락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대사의 뉘앙스를 자막으로 어떻게 번역하면 좋았을지에 대해서는 다소간의 아쉬움이 있다. 김소희/ 영화평론가 cafe.daum.net/cwg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