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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영광? 배신의 영광! 아, 허무주의여
2002-10-22

배신의 계절이다. 온갖 수사로 포장된, 말하는 자신도 믿지 않는 거짓 신념과 상황 논리로 동지의 등에 칼을 꽂는, 배신의 계절이다. <가문의 영광>에 관객이 몰리는 것은 그래서 당연한지도 모른다. 여러 차례의 대선과 총선을 통하여 경험으로 학습된, 배신의 계절을 직감한 관객들은 <가문의 영광>(감독 정흥순)을 보면서 웃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과장된 추측일 것이다. 여하튼 이 영화에 깃든 허무한 웃음은 이 배신의 계절에 위로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하기도 하다.

영화는 여수의 조폭 두목 장이 엘리트 사위를 끌어들이는 과정을 중심 플롯을 삼고, 결혼 당사자인 두 남녀의 사랑을 주변 플롯으로 삼고 있다. 영화의 재미는 중심 플롯에서 나오고 남녀 결합의 욕망을 보고자하는 관객의 열망은 주변 플롯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 플롯들간의 이음새는 ‘스타 이미지’와 ‘스타의 코믹 연기’로 채워놓았다. 사극 <용의 눈물>의 유동근씨가 조폭 두목의 큰아들로, 연기보다는 ‘떠나라’ 카드로 더 유명한 정준호씨가 엘리트 사위로, 깜찍순진한 이미지의 광고 모델 김정은씨가 조폭 두목의 딸로 나온 것이 스타 이미지 마케팅이었다면, 그들의 푼수 연기는 관객들의 스타 컴플렉스를 위무해주는, 보람찬 구경거리로 충분했을 것이다.

게다가 영화는 세 개의 기대감을 정교하게 배치하여 관객들을 끝까지 붙드는 데도 성공했다. 조폭 가문에 엘리트 사위는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들어갈 것인가, 정작 두 사람은 정말 사랑의 감정을 가질까라는 것이 두 개의 기대감이었다면 마지막 남은 하나는 몰랐던 두 사람이 어떻게 함께 잘 수 있었냐는 것이었다. 감독은 그 기대감을 나름대로 채워주었다. 논리의 부족은 넌센스 코미디로, 정서의 부족은 질퍽거리는 입담으로 채운 것이었다. 모든 게 영화적 위조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가문의 영광>은 위험하기도 하다. ‘진정한’ 가문의 영광을 바라는 영화들의 운신의 폭을, 본의가 아니라 하더라도, 더 좁혀 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보다는, 기껏해야 양아치 수준인 자들이 ‘가문의 영광’을 위해 갖은 짓을 다해도 된다는 것, 그걸 보고 웃어야만 하는 허무주의 유포가 그렇다는 말이다.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는 무슨 짓을 해도 되는 세상, 군 면제가 떳떳치 못해도 그만이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도 대통령으로 나서도 되고, 그들 밑에서 어제의 논리를 뒤집고 굴종하는 ‘정치견’들도 아픔이 있고, 다 그렇고 그렇다는 허무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그냥 웃고 넘어가자고 그럽시다. 배신의 영광을 누립시다.

영화평론가·경희대 교수